신앙

괴로움의 자리에서 시작되는 깨달음의 방향 ㅡ청람

괴로움의 자리에서 시작되는 깨달음의 방향 ㅡ청람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깨닫는 즐거움

마음의 괴로움은 본래 마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깥에서 들어와 맑은 마음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마음의 괴로움을 싫어하지만 마음의 괴로움이 있어야 깨닫는 즐거움도 있을 수 있습니다.

글 목종스님(사단법인 총경소리 이사장)

괴로움의 자리에서 시작되는 깨달음의 방향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지하철이라는 공간은 본래 사유를 깊게 머무르게 하는 장소가 아니다. 사람들은 이동하고, 스쳐 지나가며, 시선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 그런 곳에 걸린 한 편의 글이 발걸음을 붙잡았다는 사실은, 그 문장이 지닌 힘이 단순한 위로나 교훈의 차원을 넘어섰음을 보여준다. 이 글은 익숙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으나, 그 안에 놓인 인식은 오히려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여 온 생각을 조용히 뒤집는다.

보통 사람들은 괴로움을 자신의 내부에서 발생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내가 힘들다”, “내 마음이 괴롭다”라는 표현 속에는 이미 고통이 ‘나’의 일부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러나 이 글은 그 지점을 분리한다. 괴로움은 마음에 본래 있던 것이 아니라, 바깥에서 들어와 마음을 흐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간단한 전환은 매우 큰 차이를 만들어낸다. 고통을 ‘나’의 본질이 아니라 ‘외부의 침입’으로 바라보는 순간, 인간은 자기 자신을 고통과 동일시하지 않게 된다. 괴로움은 내가 아니라, 나에게 잠시 머물다 지나가는 무엇이 된다.

이 관점은 위안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문장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고통을 대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인식이다. 고통을 제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인식해야 할 흐름으로 전환시키기 때문이다. 괴로움이 나의 내부에서 생성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반드시 사라질 수 있는 조건을 가진다. 이때 중요한 것은 고통의 크기가 아니라, 고통을 바라보는 위치다. 이 글은 그 위치를 바깥으로 이동시킨다.

그러나 이 글이 단순한 위안의 언어에 머물지 않는 이유는, 두 번째 문장에 있다. 사람들은 괴로움을 싫어하지만, 그 괴로움이 있어야 깨달음의 즐거움도 존재할 수 있다는 진술이다. 여기서 괴로움은 제거되어야 할 불순물이 아니라, 깨달음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 재배치된다. 즉, 괴로움은 부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인식의 전환을 유도하는 계기가 된다.

이 지점에서 글은 또 한 번의 전환을 이룬다. 괴로움은 더 이상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지나가는 동안 무엇인가를 남기는 경험이 된다. 괴로움이 없으면 깨달음도 없다는 말은, 고통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지나간 자리에서 인간이 얻을 수 있는 변화의 가능성을 말한다. 이때 깨달음은 단순한 이해가 아니라, 자신과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이 달라지는 순간이다.

지하철이라는 공간에서 이 글이 특별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것이 일상의 흐름과 정확히 겹쳐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이동하면서도, 동시에 각자의 괴로움을 지니고 있다. 그 괴로움은 대개 해결되지 않은 채 반복되고, 일상 속에 스며든다. 이 글은 그 반복을 멈추게 한다. 괴로움을 없애는 방법을 제시하지 않으면서도, 괴로움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도록 만든다.

한참을 들여다보게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글은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누구나 알고 있을 법한 단어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럼에도 낯설게 다가오는 것은, 우리가 익숙하게 사용하던 언어의 방향을 조용히 틀어버리기 때문이다. 괴로움은 내 것이 아니라는 말, 그리고 괴로움이 있어야 깨달음이 가능하다는 말은 서로 충돌하는 듯하면서도 하나의 흐름을 만든다. 이 모순처럼 보이는 구조 속에서, 독자는 스스로 생각을 이어가게 된다.

이 글이 남기는 것은 위로나 교훈이 아니라, 하나의 질문이다. 지금 느끼고 있는 괴로움이 정말 나의 것인가, 아니면 나를 스쳐 지나가는 것인가. 그리고 그 괴로움이 지나간 자리에서 나는 무엇을 보게 되는가. 지하철 벽에 걸린 짧은 글이 오랜 시간 시선을 붙잡는 이유는, 그 질문이 쉽게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ㅡ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