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꽃잎에 우주가 머문다 ㅡ청람 김왕식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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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꽃잎에 우주가 머문다 ― 화엄의 눈으로 세상을 다시 보다
며칠 전, 지인에게 『화엄경』에 대해 들었다. 문학을 가까이하며 살아왔지만, 경전은 언제나 한 걸음 떨어진 자리에서 바라보던 세계였다. 난해한 한자와 심오한 불교 철학이 펼쳐질 것이라는 선입견도 있었다.
하여, 책장 한켠에 꽂혀 있는 책을 펼쳤다. 막상 책장을 넘기니 예상은 빗나갔다. 어려운 말보다 더 깊은 것이 있었고, 거창한 교리보다 삶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이 숨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오래도록 마음을 떠나지 않은 한 가지가 있었다. 세상에는 홀로 존재하는 것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모든 존재는 서로를 품고 있으며, 하나 속에 전체가 있고, 전체 속에 하나가 깃들어 있다는 화엄의 세계였다.
책을 덮고 며칠이 됐다. 이른 아침 산길을 걷다가 이름조차 모르는 작은 들꽃 한 송이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화려한 장미도 아니었고,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꽃도 아니었다. 바위틈에 몸을 기대어 피어난 작은 들꽃이었다.
가까이 몸을 낮추어 바라보았다. 꽃잎 위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다. 그 작은 물방울 속에는 푸른 하늘이 비치고 있었고, 아침 햇살이 반짝이고 있었다. 꽃은 흙을 딛고 있었고, 흙은 지난 계절 낙엽을 품고 있었다. 낙엽은 숲을 지나왔고, 숲은 비와 바람을 품어 왔다. 바람은 바다를 지나왔으며, 바다는 다시 수많은 강을 품고 있었다.
순간 생각이 들었다다. ‘아, 이것이 화엄이구나.’ 작은 꽃 한 송이 안에 산이 있었고, 강이 있었으며, 하늘이 있었고, 우주가 있었다.
그제야 며칠 전 읽었던 『화엄경』이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살아가며 너무 많은 것을 따로 떼어 놓는다. 나와 남을 나누고, 성공과 실패를 갈라놓으며, 이익과 손해를 저울질한다. 사람도 직업으로 구분하고, 학력으로 평가하며, 가진 것으로 높낮이를 매긴다.
세상을 나누는 일에는 익숙하지만, 세상을 하나로 바라보는 일에는 서툴다. 화엄은 그 반대의 길을 보여 준다. 한 사람은 혼자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부모가 있었고, 스승이 있었으며, 친구가 있었고, 이름도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의 수고가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오늘 아침 식탁에 오른 밥 한 그릇에도 농부의 땀과 흙과 햇살과 비와 바람이 함께 들어 있다. 우리가 입는 옷에도, 읽는 책에도, 걷는 길에도 보이지 않는 수많은 손길이 스며 있다. 혼자 잘났다고 말하는 순간, 이미 삶의 가장 큰 진실 하나를 놓치고 있는 셈이다.
문학도 마찬가지이다. 한 편의 작품은 작가 혼자 쓰는 것이 아니다. 살아온 시간과 만난 사람들, 읽었던 책과 흘렸던 눈물, 기뻤던 날과 견디어 낸 슬픔이 한 줄 한 줄 문장이 되어 흘러나온다. 독자 또한 자신의 삶을 작품 속에 보태며 비로소 문학은 완성된다. 글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 쓰는 생명의 기록이다.
『화엄경』은 인연을 말한다. 인연은 우연한 만남이 아니다. 존재를 존재답게 만드는 생명의 질서이다. 나무 한 그루도 숲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고, 강물도 작은 샘을 잃으면 바다에 이를 수 없다. 사람도 서로를 살릴 때 비로소 자신도 살아난다.
오늘날 우리는 눈부신 문명을 이루었다. 손안에서 세계와 연결되고, 인공지능은 인간의 일을 대신하며, 과학은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가능성을 연다. 그런데도 사람들의 외로움은 줄어들지 않는다. 연결은 많아졌지만 관계는 얕아졌고, 대화는 늘었지만 공감은 메말라 간다.
풍요는 커졌는데 마음은 더 가난해졌다. 이럴수록 화엄의 가르침은 더욱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세상을 경쟁으로 바라보지 말고 공존으로 바라보라는 가르침이다. 더 많이 가지는 사람이 아니라 더 많이 품는 사람이 큰 사람이라는 가르침이다. 남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승리라는 가르침이다.
『화엄경』 마지막에서 선재동자는 쉰세 명의 선지식을 찾아 길을 떠난다. 왕에게도 배우고, 장사꾼에게도 배우며, 수행자뿐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삶의 지혜를 얻는다.
생각해 보면 우리 역시 날마다 그런 순례를 하고 있다. 아이에게서는 순수를 배우고, 노인에게서는 인내를 배운다. 들꽃에게서는 겸손을 배우고, 큰 나무에게서는 기다림을 배운다. 강물에게서는 쉼 없이 흘러가는 삶을 배우고, 별에게서는 말없이 빛나는 존재의 품격을 배운다. 세상은 거대한 학교이고, 삶은 끝없는 배움의 노정이다.
그날 산길에서 만난 작은 들꽃은 내게 한 권의 경전이었다. 말없이 화엄을 읽어 주는 스승이었다. 돌아오는 길 내내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세상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들꽃도 그대로였고, 산도 그대로였으며, 하늘도 변함이 없었다. 달라진 것은 세상이 아니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었다. 어쩌면 깨달음이란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는 일이 아니라, 늘 곁에 있었던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 이후 작은 들꽃 한 송이는 더 이상 작은 꽃이 아니었다. 우주가 머무는 자리였고, 생명이 서로를 품는 화엄의 세계였으며, 오늘도 말없이 삶의 본질을 가르쳐 주는 가장 아름다운 스승이었다.
ㅡ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