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지금이라는 자리에서 ㅡ청람 김왕식

지금이라는 자리에서 ㅡ청람 김왕식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지금이라는 자리에서

저녁이 천천히 산허리를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바람은 가볍게 나뭇잎을 건드렸고,

그 소리는

마치

누군가의 오래된 이야기를 불러내는 듯했다.

달삼은 돌계단에 앉아 있었다.

얼굴에는 아직 풀리지 않은 생각들이 어둠처럼 내려앉아 있었다.

“스승님.”

조용히 부르는 목소리였다.

“왜 사람은 늘 마음이 불편합니까.

지나간 일을 생각하면 후회가 되고,

앞으로 올 일을 생각하면 두려워집니다.

가만히 있어도

마음이 편한 순간이 없습니다.”

스승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발끝으로 떨어진 낙엽 하나를 살짝 밀어보았다.

“달삼아, 그 낙엽을 보아라.”

달삼이 시선을 내렸다.

“이미 떨어진 잎이다.

그런데

네가 저 잎을 다시 가지에 붙이려 한다면 어떻겠느냐.”

“불가능합니다.”

“그렇지.

그런데 사람은 늘 그것을 하려 한다.

이미 끝난 시간을 붙잡고 다시 살려보려 한다.”

달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스승이 다시 말했다.

“그럼 이번에는 저 길 끝을 보아라.”

아직 어둠이 닿지 않은 길 끝에는 희미한 빛이 남아 있었다.

“저 끝에 무엇이 있을지 아느냐.”

“모릅니다.”

“그렇다.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사람은 그 길 끝에 무엇이 있을지 스스로 상상하고, 그 상상에 겁을 먹는다.”

달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스승은 이번에는 달삼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너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여기 있습니다.”

“지금 숨 쉬고 있느냐.”

“그렇습니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달삼의 눈이 잠시 흔들렸다. 스승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과거는 이미 네 몸을 떠난 시간이다.

미래는 아직 네 몸에 들어오지 않은 시간이다.

그런데 너는 떠난 것을 붙잡고, 오지도 않은 것을 끌어당기며 스스로를 지치게 한다.”

바람이 한 번 더 지나갔다.

“행복은 언제 생기는지 아느냐.”

달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언제입니까.”

“지금이다.”

짧은 말이었다. 그러나 그 말은 쉽게 지나가지 않았다.

“지금을 놓치는 이유는 단 하나다.

지금이 아닌 곳에 마음을 두기 때문이다.

이미 지나간 곳이나 아직 오지 않은 곳에.”

달삼은 고개를 숙였다.

“그럼 과거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기억하되, 머물지 마라.”

“미래는요.”

“준비하되, 두려워하지 마라.”

달삼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둠이 더 깊어졌고, 벌레 소리가 낮게 깔렸다.

“스승님.”

“말해라.”

“지금, 조금 마음이 가벼워진 것 같습니다.”

스승은 미소도 짓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달삼은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 하나가 막 떠오르고 있었다.

그 별은 어제의 것도 아니고, 내일의 것도 아니었다. 그저,

지금 그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달삼은 그제야 처음으로, 아무것도 붙잡지 않은 채 그 빛을 오래 바라볼 수 있었다.

ㅡ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