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가 남긴 물고기 뼈 ㅡ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ㅡ산티아고가 남긴 물고기 뼈
젊은 시절에는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만 눈에 들어온다. 정상에 오른 사람, 큰돈을 번 사람, 박수를 받는 사람. 세상도 그런 이야기들을 앞세운다. 마치 인생이란 결승선에 먼저 도착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훈장인 듯 떠든다.
나이 들어 알게 되는 것이 있다. 인생은 의외로 정상보다 하산길이 더 길다는 사실이다. 올라갈 때는 앞만 보면 된다. 내려올 때는 다르다. 무릎도 아프고, 숨도 차고, 짐도 무겁다. 무엇보다 올라갈 때 보이지 않던 것들이 내려올 때 보이기 시작한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다시 읽으며 자꾸 눈길이 머무는 장면이 있다.
거대한 청새치를 잡아 배 옆에 매달고 돌아오던 산티아고의 뒷모습이다. 사실 이야기의 절정은 청새치를 낚는 순간이 아니다. 상어 떼가 몰려드는 순간부터다. 청새치는 이미 잡았다. 그런데도 시련은 끝나지 않는다. 외려 그때부터 시작된다. 살다 보면 비슷한 일을 자주 만난다. 어렵게 시험에 합격했는데 직장생활이 더 어렵다.
죽도록 일해 집 한 채 마련했는데 대출이 잠을 쫓아낸다. 자식 키우는 재미로 살았는데 정작 다 키워 놓으니 빈방만 남는다. 산 하나 넘었더니 또 다른 산이 기다린다.
인생은 유난히 도착 이후에 숙제를 내주는 재주가 있다. 산티아고의 청새치는 어쩌면 우리 각자의 꿈일지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건강이고, 누군가에게는 사랑이고, 누군가에게는 명예이고, 누군가에게는 평생 품어 온 소망일 수 있다.
문제는 청새치를 잡는다고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상어는 늘 돌아오는 길에 나타난다. 이상하게도 그렇다. 청춘은 목표를 향해 달릴 힘이 있다. 중년은 지켜낼 힘이 필요하다. 노년은 놓아줄 힘이 필요하다. 삶은 나이를 먹을수록 무언가를 얻는 기술보다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기술을 가르친다.
산티아고가 육지에 도착했을 때 남은 것은 거대한 물고기의 뼈뿐이었다. 세상 기준으로는 실패였다. 신문 기사도 나지 않는다. 축하 현수막도 걸리지 않는다. 성과 보고서에 적을 숫자도 없다.
이상하게 독자는 그 노인을 패배자라고 부르지 못한다. 바다에서 돌아온 것은 물고기가 아니라 한 인간의 품위였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 삶에도 그런 순간들이 있다.
얻은 것은 없는데 잃은 것도 아닌 날. 손에 쥔 것은 없는데 가슴은 이상하게 단단해진 날. 결과는 초라한데 과정만은 부끄럽지 않은 날. 그런 날들이 사람을 만든다.
어느새 예순을 넘고,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면 청새치보다 산티아고가 보인다. 얼마나 큰 물고기를 잡았는지보다 얼마나 오래 바다를 사랑했는지가 궁금해진다.
얼마나 성공했는지보다 얼마나 사람답게 살았는지가 눈에 들어온다. 세월은 인생의 질문 자체를 바꾸어 놓는다.
산티아고는 물고기를 잃었다. 바다는 그의 편이 아니었다. 상어도 그의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의 이야기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유는 따로 있다. 인간이란 존재는 가진 것의 크기로 기억되지 않기 때문이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태도, 끝내 무너지지 않은 품격, 마지막 순간까지 놓지 않았던 자존. 사람은 결국 무엇을 이루었는가보다 어떻게 견디었는가로 남는다. 헤밍웨이가 남긴 노인은 거대한 청새치를 보여 주기 위해 태어난 인물이 아니다.
폭풍 속에서도 자기 자신을 잃지 않는 한 사람의 뒷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바다로 나갔던 노인이다. 살아보니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승리는 남보다 앞서는 일이 아니었다.
파도에 젖은 채 돌아와도 다시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마음. 어제보다 가진 것이 적어도 오늘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 그 마음 하나 잃지 않는 일. 산티아고가 끝내 지켜 낸 것도, 어쩌면 그것 하나였는지 모른다.
ㅡ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