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과 명예에 대하여 ㅡ청람 김왕식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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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과 명예에 대하여
저녁은 오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겉에 붙어 있던 빛을 한 겹씩 벗겨내는 일이었다. 낮 동안 또렷하던 것들이 서서히 제 윤곽을 풀어놓고, 이름 붙은 것들이 하나씩 제 이름을 잊어가는 시간. 그 희미해지는 세계의 끝에서 외려 더 선명해지는 것이 있었다. 사람의 마음이었다. 낮에는 분주함 속에 숨어 있던 생각들이, 해 질 무렵이면 마치 오래 참았다는 듯 마루 끝으로 걸어 나왔다.
달삼은 그 저녁의 고요 속에 앉아 있었다. 손바닥으로 마루를 짚으니 낮의 온기가 아직 나뭇결 속에 남아 있었다. 그는 그 미미한 따뜻함을 오래 만지작거리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스승님.”
스승은 대답 대신 차를 따랐다. 물이 잔에 닿으며 내는 소리는 작았으나, 그 소리는 이상할 만큼 깊었다. 마치 비어 있는 그릇만이 낼 수 있는 울림 같았다.
“사람은 왜 이름을 남기고 싶어 합니까.”
스승은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잠시 달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질문이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마음 깊은 데서 올라온 것임을 아는 듯한 눈빛이었다.
“이름이 남는다는 것은 무엇이냐.”
달삼은 잠시 생각했다. 질문은 익숙했으나, 대답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기억해 주는 것 아닙니까. 잊히지 않는 것, 널리 알려지는 것….”
스승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명성이라 한다.”
달삼은 낮게 되물었다.
“명성… 그것은 나쁜 것이 아닐 텐데요.”
“그렇다. 나쁘지 않다. 문제는 그것을 무엇으로 여기느냐에 있다.”
“무엇으로 여긴다는 말씀이십니까.”
“결과로 여기면 괜찮다. 그러나 목적이 되면 위험하다.”
달삼은 조금 더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사람은 왜 그렇게까지 이름을 원합니까.”
스승은 하늘 끝으로 시선을 보냈다. 저물녘의 빛이 산등성이에 얇게 걸려 있었다.
“잊히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달삼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잊히는 것이요?”
“그렇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이 세상에 잠시 왔다가 사라진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안다. 그래서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한다. 이름이 남으면, 마치 자신도 조금 더 오래 남는 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달삼은 한참 동안 그 말을 되씹었다.
“그 마음은… 자연스러운 것입니까.”
“자연스럽다. 그러나 자연스럽다고 해서 늘 옳은 것은 아니다.”
잠시 바람이 지나갔다. 처마 끝에 매달린 그림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스승이 다시 말했다.
“명성은 대부분 사람들의 입에서 만들어진다. 누군가가 말하고, 또 누군가가 그것을 옮기며 커진다. 그래서 명성은 네가 쌓는 것 같지만, 실은 네 바깥에서 부풀어 오르는 것이다.”
“그럼 명성은 내 것이 아니란 말입니까.”
“완전히는 아니다.”
“노력해도 소용없다는 뜻입니까.”
“아니다. 노력은 필요하다. 다만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다. 시대가 받아주어야 하고, 우연이 거들어야 하며, 때로는 오해조차 너를 밀어 올린다. 그러니 명성은 얻을 수는 있어도 소유할 수는 없다.”
달삼은 고개를 숙였다.
“그렇다면 허망한 것이군요.”
스승은 미세하게 고개를 저었다.
“허망하다고만 할 수는 없다. 명성은 때로 사람을 더 큰 자리로 이끌고, 더 넓은 책임을 맡게 한다. 좋은 일을 더 널리 펼칠 기회가 되기도 한다. 다만 그것을 자신의 본질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달삼이 물었다.
“본질이 아니라면, 사람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스승은 이번에는 손을 들어 제 가슴 쪽을 가리켰다.
“여기다.”
“가슴이요.”
“명예다.”
달삼은 조금 놀란 듯했다.
“명예는 명성과 어떻게 다릅니까.”
스승은 천천히 말을 골랐다.
“명성은 남이 너를 어떻게 말하느냐에 달려 있다. 명예는 네가 스스로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달려 있다.”
달삼은 말없이 듣고 있었다.
“명성은 밖에서 붙여주는 이름이고, 명예는 안에서 지켜내는 기준이다. 명성은 사람들 사이에서 높아지고 낮아지지만, 명예는 혼자 있을 때 비로소 드러난다.”
“혼자 있을 때요?”
“그렇다. 아무도 보지 않아도 지켜야 할 것이 있다. 아무도 모르더라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 손해를 보더라도 버리지 말아야 할 마음이 있다. 그것이 명예다.”
달삼은 한숨처럼 낮은 숨을 내쉬었다.
“그러면 명예는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까.”
“처음에는 그렇다.”
스승의 목소리는 더욱 낮아졌다.
“명예는 원래 조용한 것이다. 떠들썩하지 않다. 큰 소리로 자기를 증명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결국 드러난다. 말이 아니라 삶으로. 사람의 걸음걸이로, 시선으로, 선택으로.”
“선택으로요?”
“그렇다. 사람은 중요한 순간에 자기 안에 있는 것을 드러낸다. 쉬운 이익과 어려운 옳음이 마주칠 때, 그가 무엇을 택하는지가 그 사람의 명예를 말해준다.”
어둠이 조금씩 마루 밑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달삼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스승님, 세상에는 명성을 얻기 위해 명예를 버리는 사람도 많습니다.”
“많다.”
“왜 그렇습니까.”
스승은 손에 쥔 찻잔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명성은 빠르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더 쉽게 믿고, 곧바로 박수 쳐준다. 그러나 명예는 느리다. 때로는 박수 대신 침묵을 감수해야 하고, 인정 대신 오해를 견뎌야 한다.”
“그러니 많은 이들이 조급해지는군요.”
“그렇다. 오늘 높아지고 싶은 마음이 내일 떳떳해야 할 마음을 이겨버리는 것이다.”
달삼이 물었다.
“그럼 명예를 지킨다는 것은, 늘 손해를 감수한다는 뜻입니까.”
스승은 옅게 웃었다.
“겉으로는 손해처럼 보일 때가 많다. 그러나 끝내 잃지 않는 것이 있다.”
“무엇입니까.”
“자기 자신이다.”
그 말은 천천히 떨어졌으나 무거웠다.
“명성을 위해 명예를 버리면, 밖으로는 높아질 수 있다. 그러나 안에서는 허물어진다. 반대로 명예를 지키다 보면, 때로는 이름이 늦게 오거나 아예 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잃지 않는다.”
달삼은 손가락으로 마루의 나뭇결을 따라 문질렀다.
“사람은 왜 자기 자신을 잃고도 모를까요.”
“밖의 소리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밖의 소리라면….”
“칭찬, 비난, 기대, 비교, 소문. 그런 것들이 커질수록 사람은 자기 안의 조용한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그래서 어느 날 문득 높은 자리에 올라서도,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게 된다.”
한순간 둘 사이에 긴 침묵이 흘렀다. 멀리서 산새 한 마리가 짧게 울고는 잠잠해졌다. 달삼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명성을 바라지 말아야 합니까.”
스승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명성은 얻어라.”
달삼의 눈이 커졌다.
“얻으라고요?”
“그렇다. 할 수 있다면 얻어라. 네가 지닌 재능과 진심과 수고가 사람들에게 닿아 널리 알려지는 것 자체는 나쁜 일이 아니다. 다만 그것을 위해 자신을 바꾸지 마라.”
“자신을 바꾸지 말라….”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모습만 골라 보여주기 시작하면, 너는 이미 이름을 위해 영혼을 흥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 순간부터 명성은 네 것이 아니라 너를 다스리는 주인이 된다.”
달삼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럼 명예는 어떻게 지킬 수 있습니까.”
스승은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너는 혼자 있을 때도 부끄럽지 않은가.”
달삼은 바로 답하지 못했다.
“그 질문 앞에서 오래 머물 수 있어야 한다.”
스승이 말을 이었다.
“명예는 거창한 데 있지 않다. 작은 거짓을 쉽게 하지 않는 것, 약한 사람 앞에서 함부로 굴지 않는 것, 이익이 걸려도 옳다고 믿는 편에 서는 것, 잘못했을 때 핑계보다 책임을 먼저 생각하는 것. 그런 사소해 보이는 것들이 모여 한 사람의 명예가 된다.”
“그러면 명예는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겠군요.”
“그렇다. 명예는 쌓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다.”
달삼은 깊이 숨을 들이켰다.
“스승님, 만약 명성과 명예가 서로 반대 방향으로 나를 끌어당긴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스승은 이미 그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때는 명예를 택해라.”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왜 그렇습니까.”
스승은 해가 거의 진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명성은 잃어도 다시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명예는 한 번 깊이 무너지면, 다시 세우기 어렵다. 명성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는 것이지만, 명예는 네 영혼의 뼈대가 되는 것이다.”
달삼은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영혼의 뼈대….”
“그것이 무너지면 사람은 겉으로 아무리 멀쩡해 보여도 안에서 서 있지 못한다.”
어둠이 한층 짙어졌다. 마루 끝과 뜰의 경계가 서서히 지워지고 있었다. 달삼이 마지막으로 물었다.
“스승님, 만약 둘 중 하나만 남길 수 있다면… 이름입니까, 사람입니까.”
스승은 달삼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는 엄한 뜻보다 연민이 먼저 담겨 있었다. 마치 누구나 한 번은 반드시 통과해야 할 질문을 앞에 둔 이를 바라보는 눈빛 같았다.
“그때는 망설이지 마라.”
달삼의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무엇을 택해야 합니까.”
스승의 대답은 늦지 않았다.
“너를 남겨라.”
바람이 멎었다. 마치 그 말이 들리도록 저녁이 잠시 숨을 죽인 듯했다. 달삼은 더 묻지 않았다. 그의 침묵은 조금 전의 침묵과 달랐다. 그 침묵 속에는 막연함 대신 무게가 있었고, 어둠 대신 생각이 있었다. 이름이 아니라, 자신을 지키는 일. 널리 알려지는 것보다, 오래 부끄럽지 않을 것.
달삼은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사람이 끝내 남겨야 하는 것은 세상이 불러주는 이름이 아니라, 세상이 다 지나간 뒤에도 스스로 외면하지 않을 자기 자신의 얼굴이라는 것을.
저문 하늘 아래, 아직 식지 않은 마루의 온기 위에서 그는 처음으로 조용히 배워가고 있었다.
높아지는 법이 아니라, 무너지지 않는 법을.
ㅡ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