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수에 뜬 달 ㅡ청람 김왕식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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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수에 뜬 달
아버지는 갔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끝나지 않은 전쟁 하나를 가슴에 품은 채
서른몇 해의 봄을 건너고 한 그루 나무처럼 허공 쪽으로 먼저 쓰러졌다.
그날부터 집은 갑자기 넓어졌다. 방 안의 바람마저 어른이 되어야 했고
서른셋 어머니는 홀시어머니 여섯 남매라는 일곱 개의 허기를 품고 세상의 겨울과 마주 섰다.
새벽이면 동구 밖 어둠에서 이슬 몇 방울 주워 담고 밤새 하늘을 떠돌던 달 한 조각을 정화수에 띄웠다.
장독대 위 물그릇은 물을 담은 것이 아니라 견디지 못한 울음들을 잠시 쉬게 하는 작은 바다였다.
어머니의 손은 손이 아니었다.
논바닥의 가뭄을 지나온 흙길이었고 거북등짝처럼 갈라진 세월이었으며
겨울마다 바람이 칼끝으로 새겨놓은 기도문이었다.
천지신명이시여 내 팔은 부러져도 좋으니 아이들 꿈은 부러지지 않게 하소서
내 등은 휘어져도 좋으니 아이들 길은 휘지 않게 하소서.
정화수 위로 떨리던 입술은 한 여인의 소원이 아니라 한 집안의 새벽을 밝히는 작은 등불이었다.
어머니는 한 번도 꽃으로 살지 못했다.
봄에는 씨앗이 되었고 여름에는 논물이 되었고 가을에는 볏짚이 되었으며 겨울에는 장작이 되어 자신을 태워 우리를 데웠다.
우리가 자란 것은 밥알의 힘만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삼킨 눈물과 잠든 새벽마다 하늘로 올려 보낸 간절한 기도들이 우리의 뼈가 되고
우리의 숨이 되었다. 세월은 강물처럼 흘러 아이들은 저마다 삶이라는 들판으로 흩어졌지만
어머니의 주름 속에 숨어 있던 별빛들은 한 번도 제 이름으로 환하게 피어나지 못했다.
꽃구경 한 번 마음껏 못 하고 좋은 옷 한 벌 당신을 위해 장만하지 못한 채
어머니는 저녁노을처럼 조용히 하늘 건너편으로 사라졌다.
달 밝은 밤이면 하늘 어느 마을 장독대 곁에서 어머니는 여전히 맑은 물 한 그릇 떠놓고
우리 이름을 하나씩 불러보고 있을 것만 같다.
별들은 그 곁에 둘러앉아 그 오래된 기도를 듣고 달은 정화수 위에 내려와 한 생애의 그리움을 흔들고 있을 것이다.
세상의 깊이를 재는 자가 있다면 바다의 수심부터 재지 말 일이다.
남편 먼저 보내고 홀시어머니 모시며 여섯 남매를 품어 키운 한 여인의 침묵을 먼저 재보아야 한다.
새벽마다 정화수에 달을 띄우며 무너지지 않으려 버텨낸 그 가슴의 깊이 앞에서는 푸른 바다조차 잠시 말을 잃는다.
ㅡ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