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예배당 가는 길에 ㅡ청람 김왕식

예배당 가는 길에  ㅡ청람 김왕식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예배당 가는 길에

어제와 그제는 제주에서 올라온 태풍의 영향으로 소낙비가 여러 차례 지나갔다. 비는 지붕을 두드렸고, 바람은 창문을 흔들었다. 젖은 세상이 잠시 숨을 고르는 듯했다.

오늘 아침은 다르다. 밤새 비구름이 물러갔는지 하늘은 높고 푸르다. 햇살은 갓 닦은 놋그릇처럼 맑게 번지고, 나뭇잎 끝에는 아직 빗물이 남아 반짝인다.

예배당으로 가는 길이다. 걸음을 옮기며 불현듯 생각한다. 교회에서는 일요일이라는 말보다 주일이라는 말을 더 많이 쓴다. “오늘은 주일입니다.” 오랫동안 들어온 말이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말이다. 예배당 안에서는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교회 밖 사람들에게는 꽤 낯선 말일 수도 있겠다. 달력에는 분명 일요일이라 적혀 있는데, 교회에 들어오면 어느새 주일이 된다.

왜 그럴까. 사실 성경적으로 따지면 안식일은 토요일이다. 창세기에 기록된 창조의 질서 속에서 하나님은 엿새 동안 세상을 지으시고 일곱째 날에 쉬셨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킨다. 오늘날에도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토요일에 예배를 드린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성경의 안식일은 분명 토요일이다. 틀린 말이 아니다. 역사적으로도 그렇고 성경적으로도 그렇다. 그렇다면 대부분의 교회는 왜 토요일이 아닌 일요일에 모여 예배를 드리며, 그날을 안식일이라 부르지 않고 주일이라 부를까.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이 안식일 다음 날, 곧 일요일이었기 때문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날을 특별하게 기억했다. 죽음이 생명으로 바뀐 날. 절망이 희망으로 바뀐 날. 무덤의 돌문이 열리고 인간 역사의 새로운 장이 시작된 날. 그들은 그날을 단순한 요일로 부르기보다 주님의 날이라고 불렀다.

주일이라는 말은 그렇게 생겨났다. 안식일과 구별되는 신앙의 고백이었다. 생각해 보면 일요일은 달력의 언어이고, 주일은 믿음의 언어이다. 같은 하루를 바라보면서도 담아내는 의미가 다른 셈이다.

예배당으로 가는 길, 이런 생각도 든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 익숙한 언어 속에 살아서 그 말이 얼마나 낯설게 들릴 수 있는지를 잊고 사는지도 모른다. 교회 안에서는 너무 자연스러운 말이 교회 밖에서는 생소한 말이 된다. 은혜라는 말도 그렇고, 구원이라는 말도 그렇고, 주일이라는 말도 그렇다. 낯선 사람에게는 설명이 필요하다. 설명 없는 언어는 벽이 되기 쉽다. 예수께서는 늘 사람들의 언어로 말씀하셨다. 씨 뿌리는 농부 이야기로, 길 잃은 양 이야기로, 겨자씨 이야기로 말씀하셨다. 하늘의 진리를 땅의 언어로 풀어내셨다. 사람을 이해시키기 위해서였다. 신앙이 깊어진다는 것은 자신의 언어만 고집하는 일이 아니라 상대의 언어도 이해하려 애쓰는 일인지 모른다.

일요일이라 부른다고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다. 주일이라 부른다고 더 거룩한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이름 속에 무엇을 담고 살아가느냐일 것이다. 주일이라는 말에는 부활의 기쁨이 담겨 있고, 일요일이라는 말에는 일상의 자연스러움이 담겨 있다. 그 둘이 서로 다투어야 할 이유는 없다. 예배당 첨탑이 멀리 보인다. 종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마음은 이미 예배당 문 앞에 가 있다. 맑게 갠 하늘 아래 걷는다. 어제의 비를 지나 오늘의 햇살을 만난 것처럼, 사람도 저마다 다른 생각과 다른 믿음을 품고 살아간다. 그 차이를 이해하는 마음이야말로 어쩌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또 하나의 예배인지도 모르겠다.

주일 아침. 예배당으로 가는 길이 유난히 평화롭다.

ㅡ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