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김경옥 시조시인의 시조 〈백로와 추분 사이〉를 읽고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평하다

김경옥 시조시인의 시조 〈백로와 추분 사이〉를 읽고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평하다

□ 김경옥 시조시인

백로와 추분 사이

시조시인 김경옥

잘 익은 감나무 끝에 하마 벌써 한가위 달

백 년 만에 추석 슈퍼 문 어둠을 밀어내고

낮보다 더 눈부신 달이 나무 사이 걸렸다

풋내도 삭히며 질풍노도 지나며

나 다운 나를 찾아서 모서리를 깎는 시간

그 눈빛 깊어진 만큼 향기 더욱 짙어라

죽순처럼 쑥쑥 자란 명문장으로 그득한

시집들이 시집온 우편함은 배가 불러

김매기 거름 없이도 살 모르는 가을날

□ 김경옥 시조시인

2012년 <시조미학> 창간호 백일장 장원,

2015 <유심> 신인상

열린시학상, 나혜석문학상, 한국가사문학 우수상 등을 수상했다.

수원전산여고 교장을 역임한 후

수원문협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시인은 한국시조시인협회 ‘시조미학’으로 등단해

시집《코스모스와 달》,《덕자》,《노송지대 꽃길에 앉아》를 펴냈다. 또한 시인은 경기시조시인협회 부회장과 한국시조시인협회 상임이사를 맡아 시조문단에서 왕성히 활동하고 있다.

김경옥 시조 〈백로와 추분 사이〉를 읽고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김경옥 시인의 시조 〈백로와 추분 사이〉는 한 편의 계절 노래를 넘어선다. 단순히 절기의 흐름을 기록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삶의 무늬와 정신의 깊이를 포착해내는 작품이다.

시인은 자연의 장면을 빌려와 자기 성찰과 존재의 빛을 응축시킨다. 그 결과, 독자는 계절의 달빛을 보면서 동시에 인간 정신이 다다르는 고요한 완숙을 함께 체험한다.

첫 수에서 “잘 익은 감나무 끝에 하마 벌써 한가위 달”이라 노래하는 순간, 풍경은 이미 삶의 은유로 바뀐다. 감이 붉게 익고 달빛이 나무 사이 걸려드는 장면은, 오랜 세월 견뎌온 내면의 결실을 가리킨다.

무엇보다 “낮보다 더 눈부신 달”이라는 표현은 자아의 빛을 낮추고 우주의 질서를 높이는 겸허의 미학을 드러낸다. 달은 단순한 천체가 아니라, 인간이 도달하고자 하는 초월적 빛의 상징으로 선 자리한다.

둘째 수에서 시인은 청춘의 격정과 불안을 정직하게 고백한다. “풋내도 삭히며 질풍노도 지나며 / 나 다운 나를 찾아서 모서리를 깎는 시간”이라는 대목은 자기 완성을 향한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여기에는 인생을 거슬러온 흔적과 성숙의 결실이 동시에 담겨 있다. “그 눈빛 깊어진 만큼 향기 더욱 짙어라”라는 결구는 고난을 통해 빚어진 영혼의 무게가 곧 인간을 깊게 만드는 힘임을 압축한다.

이 문장은 교단에서 제자들에게 삶의 태도를 가르쳐온 스승의 눈빛과도 닮아 있다.

셋째 수에 이르러 시선은 창작과 언어의 세계로 옮겨간다. “죽순처럼 쑥쑥 자란 명문장”은 생명력의 비유를 빌려 문학적 영감의 왕성을 표현하고, “시집들이 시집온 우편함”은 창작의 결실이 차곡차곡 쌓이는 기쁨을 드러낸다. 흙과 거름이 없어도 저절로 여무는 가을의 비유는, 문학이 억지로 꾸며내지 않아도 삶 자체에서 드러나는 진실임을 말해준다.

이 또한 제자들에게 억지로 지식을 주입하기보다 삶 속에서 스스로 배우게 이끌던 스승의 품성과 통한다.

이렇듯 시인의 언어는 늘 자연과 호흡하며, 그 속에서 자기 존재의 답을 구한다. 사소한 풍경 하나에도 성찰의 빛을 부여하고, 계절의 변화에서 인간의 내면 변주를 끌어내는 방식은 전통 시조의 형식에 현대적 감각을 입히는 길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백로와 추분 사이〉는 결국 한 생애가 지향한 철학을 정제된 언어로 빚어낸 결과물이다. 시인은 시를 통해 삶을 투시하고, 삶을 통해 시의 울림을 증명한다. 그에게 시조는 단순한 형식이 아니라, 존재를 다듬는 연마의 도구이자 정신의 거울이다.

이 작품은 단순한 계절가가 아니라, 시간과 존재, 성숙과 초월이 만나 빚은 투명한 언어의 결정이라 할 수 있다.

김경옥 시인의 시조는 독자에게 말없이 전한다. 삶을 오래 겪어낼수록 언어는 화려하지 않아도 더욱 깊어지고, 빛은 작아도 더 멀리 번진다는 사실을. 바로 그 빛은 제자들의 마음속에도 오래 남아, 존경받는 스승의 품격으로 이어진다.

ㅡ 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