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달산, 화성행궁 – 김경옥 시인의 시 세계 ㅡ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평하다

팔달산, 화성행궁
시조시인 김경옥
읽던 책 밀쳐놓고 마당으로 내려온
배롱꽃 분홍입술을 주인 없는 산바람이
신풍루 기둥 사이로 그만 훔쳐 달아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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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달산, 화성행궁 – 김경옥 시인의 시 세계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김경옥 시인의 ‘팔달산, 화성행궁’은 짧은 시조 속에 한 도시의 결, 자연의 숨결, 그리고 인간 내면의 정서를 동시에 품어내는 정갈한 서정의 결정체다. 읽는 순간 시는 ‘보인다’기보다 ‘머문다.’ 눈앞의 장면으로 스쳐 지나가지 않고, 마음속에 고요히 내려앉아 천천히 흔들린다. 바로 이 고요한 흔들림이 김경옥 시인의 시학을 이루는 중심 축이다.
첫 구절, “읽던 책 밀쳐놓고 마당으로 내려온”은 일상의 질서를 잠시 비켜서서 다른 세계로 향하는 발걸음을 암시한다. 김경옥 시인의 작품에서 ‘일상’은 늘 시의 문턱이다. 시인은 일상을 버리지 않는다. 다만 그 일상의 문고리를 살짝 틀어 새로운 감각과 세계를 마주하는 길을 연다. 읽던 책을 밀쳐놓는 행위는 단절이 아니라 ‘열림’이며, 마당으로 내려오는 행위는 자연과 관계의 중심으로 다가가는 조용한 몸짓이다. 시인의 삶의 철학이 바로 이 ‘열림’과 ‘낮춤’ 속에 있다. 낮추어진 몸의 위치에서만 비로소 진짜 자연과 진짜 삶이 보인다고 믿는 태도이다.
이어지는 “배롱꽃 분홍입술을 주인 없는 산바람이”는 김경옥 시인의 섬세한 감각이 온전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배롱꽃의 분홍빛을 ‘입술’로 비유한 것은 단순한 미적 장치가 아니다. 배롱꽃은 여름의 긴 햇살 아래 쉼 없이 피어오르는 질긴 아름다움을 지닌 꽃이다. 그 꽃을 ‘입술’로 느낀 것은 꽃을 생명으로, 존재로, 감정으로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이 반영된 것이다. 김경옥의 시에서 자연은 객체가 아니라 대화의 상대이며, 존재의 심층을 드러내는 거울이다. 꽃을 바라보는 순간 시인은 그 안에서 생명, 체온, 감정까지 읽어낸다. 이것이 김경옥 시인의 작품 세계가 지닌 투명한 감수성, 즉 ‘보는 그대로를 보되, 그 너머까지 들여다보는 눈’이다.
마지막 구절 “신풍루 기둥 사이로 그만 훔쳐 달아나네”는 한 폭의 수채화를 닮았다. 산바람이 배롱꽃의 입술을 ‘훔쳐’ 달아난다는 표현은 자연의 장난기이자 삶의 무상함에 대한 은근한 깨달음이다. 바람은 항상 지나가고, 꽃은 피었다가 지며, 시인은 그 사이에서 찰나를 붙잡는다.
김경옥 시인은 그 찰나를 억지로 붙들려 하지 않는다. 붙잡으려는 순간 이미 바람은 지나가 있고, 아름다움은 다른 자리로 옮겨 가버린다는 것을 잘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의 시는 잡으려 하지 않아 더 아름답다. 떠남을 허락하는 미학, 흩어짐을 받아들이는 마음, 그것이 김경옥 시인의 시 세계가 지닌 결이다.
‘팔달산, 화성행궁’은 공간의 이름을 빌려왔으나, 공간 묘사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팔달산과 행궁은 배경이 아니라 ‘시인의 존재가 잠시 쉬어가는 자리’로 변모한다. 이 공간들은 역사적 시간과 현재의 순간이 겹쳐 흐르는 곳이며, 김경옥 시인의 감수성은 그 공간의 숨결 속에서 자연의 작은 떨림 하나까지 놓치지 않는다. 그의 시는 늘 그렇듯, 크고 웅장한 것이 아니라 사소하고 미세한 빛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그 작은 빛이 결국 한 편의 시 전체를 환하게 만든다.
김경옥 시인의 삶의 가치철학은 단순하다. 자연을 존중하고, 순간을 사랑하며, 존재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 이 시조는 바로 그 철학이 단정하고 고운 언어로 구현된 작품이다. 불필요한 수식이나 과장이 없고, 오직 정직한 감각과 맑은 시선이 있을 뿐이다. 그것이 김경옥 시인의 미의식이며, 그의 시가 오래도록 사람들의 마음에 남는 이유다.
군더더기 없이, 고요하고 아름답게 완성된 시조 한 편. 그 뒤에 놓인 시인의 정신은 더없이 단단하고 깊다.
ㅡ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