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윤 화백의 꺼지지 않는 태양 ― 한 그림이 삶의 중심으로 이동하는 순간 ㅡ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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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지지 않는 태양
― 한 그림이 삶의 중심으로 이동하는 순간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이 그림은 애초부터 태양을 자처하지 않았다.
처음의 이름은 《해가 지지 않는 바다》였다.
수평으로 이어지는 세계,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지속,
잠들지 않는 풍경의 감각이 그 제목에 스며 있었다.
오지윤 화백이 오래 바라보아 온 세계의 방식이었다.
그림은 완성되는 순간 멈추지 않는다.
벽에 걸리고, 누군가의 하루 속으로 들어가면서
비로소 다른 생을 얻는다.
이 작품을 소장한 고재현 대표에게
이 그림은 어느새 하루의 시작이 되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마주하는 존재,
말을 걸지 않아도 되는 침묵 앞에
잠시 서는 시간이 일상이 되었다.
어느 날부터 그는 이 그림을
바다로 보지 않게 되었다.
시선은 수평을 따라 흐르지 않고
자꾸만 한 지점에 붙들렸다.
그 중심에서 그는 색이 아닌
박동을 느꼈다.
심장처럼 뛰는 붉은 기운을.
그는 그 변화를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다만 그림의 이름을 다시 불렀다.
《꺼지지 않는 태양》
이 명명은 제목의 수정이 아니라
그림을 바라보는 삶의 태도가 이동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이 순간, 작품은 풍경에서 중심으로 옮겨간다.
공간의 이미지에서
존재의 은유로 깊어졌다.
이 그림의 한가운데에는 붉은 심장이 있다.
그 심장은 평온하지 않다.
누런 끈이 감겨 있다.
삶의 질곡, 현실의 무게,
피할 수 없는 시간의 압력이
끈이 되어 심장을 조인다.
중요한 것은
그 끈이 심장을 끝내 가두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심장은 중간을 가르는 선을
스스로 밀어내며 통과한다.
그 선은 경계이자 억압이지만
동시에 통과의 문이 된다.
이 장면에서 오지윤 화백의 회화는
말을 아낀다.
해방을 외치지도, 희망을 선동하지도 않는다.
대신 색의 압력과 선의 저항,
물감이 쌓인 두께로 설득한다.
이 그림은
이해되기보다
먼저 몸에 닿는다.
여기서 화가의 시간이 겹쳐진다.
오지윤 화백의 손은 거칠다.
농부의 손과 닮았다.
붓고, 굳고,
물감이 손가락 마디마다 배어 있다.
그는 말한다.
이 손은 이미 캔버스의 것이라고.
허리는 늘 숙여 있다.
오랜 작업으로 근육은 단단히 굳었다.
그는 그것을 고통이라 부르지 않는다.
허리에 근육이 붙어
몸이 더 견고해졌다고
조용히 웃는다.
200호 캔버스 앞에서
그는 손끝으로 그리지 않는다.
팔과 어깨,
등과 호흡,
온몸을 사용해 밀어 넣는다.
그의 회화는 기교가 아니라
노동이며,
신체가 남긴 흔적이다.
하여
이 그림은
아침에 가장 먼저 보아야 할 그림이 된다.
그 앞에서 기를 느낀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이 회화는 장식이 아니라
에너지의 장이다.
하루를 버텨내게 하는 힘,
삶이 다시 조여 와도
중심을 식히지 않는 온도다.
《꺼지지 않는 태양》은
밝음의 그림이 아니다.
고통을 통과한 뒤에도
식지 않은 의지의 잔열에 가깝다.
그 태양은 하늘에 있지 않다.
외부에 있지도 않다.
심장 안에 있다.
끈에 묶여도
선에 가로막혀도
끝내 스스로를 확산시키는
붉은 중심으로 존재한다.
오지윤 화백의 이 작품은 말한다.
삶이 아무리 옥죄어도
심장은 꺼지지 않는다고.
예술이란
그 심장의 온도를
끝까지 책임지는 일이라고.
이 그림은 해를 그린 것이 아니다.
살아 있음이 어떻게 태양이 되는지를
끝까지 보여주는 회화다.
ㅡ 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