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

보리밭에 내리는 마음

보리밭에 내리는 마음 2025.01.11

김왕식

보리밭에 내리는 마음

텃밭 한켠에 보리가 자란다. 늦가을, 서늘한 바람이 스치고 나뭇잎이 무성히 떨어진 자리에 조용히 뿌리를 내린 보리. 부모님께서 어린 시절 심으셨던 그 보리밭의 풍경이 아스라이 떠오른다. 손끝으로 흙을 만지던 그 따스함, 바람결에 흔들리던 초록의 물결. 이제는 그 기억을 따라 조심스레 서너 평의 땅에 보리를 심었다.

보리는 강하다. 땅이 얼어붙고 서릿발이 내려도 꺾이지 않는다. 추위 속에서도 푸른 숨을 이어가는 그 생명력은 놀랍다. 울타리 주위에는 벚나무, 갈참나무, 소나무들이 저마다의 잎을 떨구어 낙엽이 되었다. 그 낙엽들이 부드러운 이불이 되어 보리밭을 덮는다. 자연이 자연을 감싸 안는다. 바람결에 사각거리는 낙엽 소리는 보리의 숨결을 지켜주는 자장가 같다.

시인 함형수가 보리밭 옆 무덤가에 해바라기를 심었다 했던가. 그 마음을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다. 생명을 심는다는 것은 그리움과 다르지 않다. 올봄, 푸르게 올라올 보리밭 위로 종달새가 지저귀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파란 물결이 일렁이고, 그 위를 자유롭게 나는 작은 새의 노랫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다. 마음의 창이 어느새 푸른 하늘에 머문다.

보리는 바람에 흔들리지만 꺾이지 않는다. 그 모습은 마치 삶의 무게를 견디며 묵묵히 한 걸음씩 나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닮아 있다. 낙엽이 쌓여도, 바람이 불어도, 보리는 자란다. 그런 보리를 바라보며, 나 또한 마음 한구석에 단단한 씨앗을 심는다. 따뜻한 봄날, 보리가 푸르게 자라듯 나의 작은 다짐도 싹을 틔우길 바라며.

그리움과 기다림이 어우러진 이 작은 보리밭은 어느새 마음속 풍경이 되어 고요히 물결친다. 한 폭의 수채화처럼, 부드럽고도 단단하게.

늦가을 서늘한 바람결 따라 텃밭 한켠 흙을 적시네 부모님의 숨결 따라 심은 보리 낙엽 이불 덮고 숨 고른다

서릿발에도 푸른 숨을 쉬며 갈참나무 벚나무 잎새 내려와 보리밭 품에 안긴다 고요한 기다림 속 작은 생명 흔들린다

봄날, 종달새 노래 따라 푸른 물결 일렁이는 보리밭 마음의 창도 하늘로 열려 그리움도 바람도 함께 날아오른다

ㅡ 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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