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

낡은 구두의 말

낡은 구두의 말 2025.04.13
낡은 구두의 말

김왕식

낡은 구두의 말

김왕식

신발장 구석, 빛바랜 갈색 구두 한 켤레. 굽은 닳고 앞코는 긁히고 가죽은 주름졌다. 버리자니 손에 밴 온기가 아쉽고, 신자니 남의 눈이 걸리는 그 세월의 짝이었다.

어느 날 문득, 손이 갔다. 솔로 먼지를 털고, 헝겊으로 문지르며 묵은 침묵을 닦아냈다. 굽엔 조심스레 본드를 발랐다. 발에 넣자마자, 낯익은 편안함이 되살아났다. 오래된 그 구두는 여전히 발을 기억하고 있었다.

거리로 나서자, 기억들이 발끝에서 깨어났다. 첫 출근길의 긴장, 데이트하던 오후의 설렘, 차분히 아버지 제사에 가던 날의 정적, 그리고, 말없이 퇴직하던 그날의 허전함.

그 모든 굽이마다 구두는 말없이 걷고 있었다. 한숨도, 미소도, 망설임도, 시간의 먼지를 밟으며, 묵묵히 함께 걸었다.

낡은 구두는 한 사람의 일기장이다. 말은 없지만, 모퉁이마다 묻어난 사연과 침묵의 기록을 품고 있다.

그날 오후, 산소를 찾았다. 진창길을 조심히 딛고, 무릎 꿇은 발아래, 낡은 구두가 조용히 말을 건넸다. “걸어온 길, 참 고마웠다.”

해 질 녘 집으로 돌아와 구두를 벗었다. 구석에 놓였던 친구는 다시 주인의 곁에 섰다. 그 밤, 어쩐지 마음 깊은 곳이 따뜻해졌다. 오래된 것들이 가르쳐주는 건 ‘빠름보다 깊이’였다.

ㅡ 청람

댓글

로그인 없이 바로 남길 수 있습니다. 나중에 본인이 수정·삭제하려면 이 댓글의 비밀번호를 정해 주세요. 서로 예의를 지켜 주세요.

  1. 불러오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