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

차 한 잔의 고요 ㅡ청람 김왕식

차 한 잔의 고요 2025.11.09
차 한 잔의 고요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차 한 잔의 고요

아침 햇살이 유리창에 닿는다. 부엌 한켠, 물이 조용히 끓는다. 김이 오르는 주전자를 바라보며 나는 잠시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저 소리를 듣는다. 물의 숨, 바람의 결, 그 사이로 흐르는 나의 마음.

차를 따르는 일은 단순하지만 그 단순함이 하루를 맑게 만든다. 찻물이 잔에 닿을 때, 세상의 소음이 잠시 멈춘다. 그 순간만큼은 나 자신도 조용해진다. 차는 단지 마시는 음료가 아니라, 하루를 가다듬는 의식이다.

한 모금의 따뜻함이 혀끝을 지나 가슴으로 스며든다. 그 부드러운 온도 속에서 나는 마음의 결을 느낀다. 차는 말이 없지만 그 침묵으로 마음을 어루만진다.

“괜찮다.”

차는 늘 같은 온도로 말한다.

사람은 종종 큰 깨달음을 먼 곳에서 찾으려 한다. 하지만 마음의 평화는 이처럼 작은 행위 안에 있다. 물을 끓이고, 차를 우려내고, 따뜻한 김을 바라보는 동안 삶의 속도가 천천히 늦춰진다. 그 느림 속에서 마음은 맑아진다.

세상은 늘 서두른다. 해야 할 일, 만나야 할 사람, 잊지 말아야 할 약속들. 차 한 잔의 시간은 그 모든 ‘해야 함’에서 벗어나 ‘있음’으로 돌아가게 한다. 차를 마시는 동안 나는 아무것도 이루지 않지만, 그 시간이 나를 이루게 한다.

찻잔은 비워야 향이 머문다. 마음도 그렇다. 무엇으로 가득 차 있으면 새로운 바람이 들어올 틈이 없다. 차를 마시며 비우는 일은 단지 잔을 비우는 일이 아니라 마음을 비우는 연습이다. 비워야 다시 채울 수 있고, 멈춰야 다시 걸을 수 있다.

차의 향은 금세 사라진다. 그 여운은 오래 남는다. 마음의 평화도 그렇다. 잠시 머물다 사라지지만, 그 흔적이 하루를 부드럽게 감싼다. 그 여운 하나로 우리는 버틴다.

차를 마시며 나는 생각한다. 이 잔이 비워질 때마다 하루가 조금 더 단단해진다고. 그건 결심이 아니라 습관이고, 수행이 아니라 삶 그 자체다. 평화는 멀리 있지 않다. 그건 늘 손이 닿는 곳에 있다.

차를 마시는 동안은 누구도 미워할 수 없다. 마음이 따뜻한 온도로 식어가고, 모든 감정이 하나의 숨으로 녹는다. 그 잠시의 고요 속에서 사람은 자신을 회복한다. 그게 수행의 시작이다.

차 한 잔을 다 마시고 나면 잔의 바닥이 보인다. 그 맑은 바닥에 어쩐지 내 마음이 비친다. 차는 이미 식었지만 그 고요는 여전히 따뜻하다. 삶이란 결국 이 한 잔의 차처럼 조용히 식어가면서 향을 남기는 일일지도 모른다.

차는 말이 없다. 그 침묵 속에서 마음은 자신을 들여다본다. 고요는 늘, 이렇게 시작된다.

ㅡ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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