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의 산등성이에서 — 어머니 황순이를 부르며
명절의 산등성이에서 — 어머니 황순이를 부르며 2026.02.19
— 어머니 황순이를 부르며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명절의 산등성이에서 — 어머니 황순이를 부르며
명절이다 이맘때가 되면 집 안의 공기가 먼저 달라지곤 했다
아직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신 새벽 부엌에서 아궁이 불은 먼저 깨어나 장작을 끌어안고 가마솥 밑을 오래 핥고 있었다
국이 끓어오르는 소리는 한 해의 첫 숨 같았고 그 김은 설날 아침의 기도처럼 지붕 밑으로 조용히 번졌다
설빔은 새 옷이 아니라 밤새 다려 놓은 어머니의 마음이었다
그러나 그 어머니의 시작은 명절보다 먼저 전쟁이었다
왜놈들의 군홧발 아래 열네 살에 댕기 풀고 이름보다 먼저 눈물을 배웠다
열여섯에 자기만 한 첫딸을 품고 그 뒤로 줄줄이 여섯을 낳는다
젖을 물리던 품은 쉰 적이 없고 등은 잠깐도 펴지지 못했다
남편은 뭐가 그리 급했는지 서른아홉에 하늘나라로 먼저 가버리고
서른셋 그 어린 나이에 세상의 짐을 혼자 등에 올려놓았다
밥은 늘 여섯 몫이었고 걱정은 늘 일곱 몫이었다
홀로 된 아흔의 시어머니를 모시고 고부간 갈등 한 줄 없이 효부로 살았다
말 한마디 먼저 높이지 않았고 밥 한 숟갈 먼저 들지 않았다
두 여인의 삶은 한 지붕 아래 서로의 등을 버팀목 삼아 이어졌다
두 여인 올림픽이 시작된 그해 늦가을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나란히 하늘로 갔다
그때 나이 환갑상도 받지 못한 쉰아홉
누가 그랬던가 아홉수 넘기기 힘들다고
지아비는 서른아홉에 자신은 쉰아홉에 세상을 떴다
지금 그 어머니는 없다
깊은 산속 양지바른 곳에 누런 잔디 속으로 몸을 낮추고 계신다
그곳에서도 아마 육 남매의 이름을 가슴에 품고
팔다리 편히 뻗지 못한 채 웅크려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고 계실 것이다
흙 위에 누워서도 기도는 위로 향한다
명절이 오면 산은 더 깊어지고 하늘은 더 멀어진다
나는 그 산등성이에 엎드려 잔디를 움켜쥔다
흙의 온도가 손바닥을 타고 올라온다
그 온기가 한때 나를 품었던 어머니의 체온과 닮아 있다
하늘을 향해 이름을 부른다
황 순 이
석 자의 이름이 가슴을 찢고 올라 허공에 걸린다
불러도 대답은 없고 대답이 없어도
나는 다시 부른다
황 ㅡ순 ㅡ이
그 이름이 명절의 첫제사처럼 입안에서 떨린다
어머니는 이제 돌아오지 않지만
그 손길은 여전히 가마솥의 김처럼
우리의 오늘을 데우고 있다.
ㅡ청람
댓글
로그인 없이 바로 남길 수 있습니다. 나중에 본인이 수정·삭제하려면 이 댓글의 비밀번호를 정해 주세요. 서로 예의를 지켜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