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김신원이 필사한, 박경리 《옛날의 그 집》을 읽다

김신원이 필사한, 박경리 《옛날의 그 집》을 읽다 2026.03.26
김신원이 필사한, 박경리 《옛날의 그 집》을 읽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김신원 친구의 박경리 시 필사본

경복고 시절 김신원 친구가

오늘 아침 페이스북에 정성스럽게 펜글씨로 필사해 올린

박경리 시 《옛날의 그 집》이다.

반가웠다.

다행히 오래전 평한 것이 있어 몇 줄 올린다.

이 시평을 김신원 친구에게 바친다.

옛날의 그 집

박경리

비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휑뎅그렁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쑥새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히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살았다 정 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 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ㅡ박경리의 마지막 시, 2008년 4월 <현대문학> 발표

고독의 집, 존재의 마지막 방

— 박경리 《옛날의 그 집》을 읽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박경리의 마지막 시 《옛날의 그 집》은 회고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단순한 과거의 회상이 아니다. 이 작품은 한 인간이 삶의 끝에서 도달한 존재 인식의 기록이며, 동시에 문학이 어떻게 한 생을 지탱해 왔는지를 증언하는 시다.

첫 행 “빗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은 이 시 전체의 정서를 결정짓는다. 병든 나무들의 집단적 죽음은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이미 기울어가는 삶의 환경, 혹은 존재의 소멸을 예고하는 상징이다. 그곳에서 “십오 년을 살았다”는 진술은 시간의 양이 아니라, 고독의 밀도를 드러낸다.

“빈 창고같이 휑뎅그렁한 큰 집”이라는 표현은 공간의 공허를 통해 내면의 상태를 비춘다. 밤이 되면 울어대는 소쩍새와 맹꽁이의 소리는 자연의 생명력이라기보다, 외려 인간의 고립을 더욱 선명하게 부각하는 배경음으로 작용한다. 그 속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는 문장은 이 시의 중심축이다. 이 고독은 선택이 아니라, 받아들여진 운명에 가깝다.

시는 단순히 고독에 머물지 않는다.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이어지는 생활의 나열은 생존의 의지를 보여준다. 고양이와 함께 살며 “정 붙이고 살았다”는 대목에서는 인간이 끝내 관계를 포기하지 않는 존재임을 드러낸다. 이는 삶을 견디게 하는 최소한의 온기다.

이 시의 핵심은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 나를 지탱해 주었고”라는 구절에 있다. 박경리에게 문학은 직업이 아니라 존재의 버팀목이었다. 특히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는 문장은 더욱 깊다. 宮刑이라는 극한의 치욕 속에서도 역사를 기록했던 사마천의 삶을 떠올린다는 것은, 글을 쓴다는 행위가 곧 자신의 존재를 지키는 마지막 방식이었음을 의미한다.

후반부로 갈수록 시는 점차 상징의 밀도를 높인다. “대문 밖에서는 / 늘 /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는 구절에서 짐승들은 현실의 고난, 혹은 인간 세계의 폭력성과 위협을 은유한다. 늑대, 여우, 하이에나로 이어지는 나열은 생존의 긴장을 극대화한다. 이 집은 더 이상 안식의 공간이 아니라, 끊임없이 위협받는 존재의 자리다. 그럼에도 마지막은 놀랍도록 담담하다.

“모진 세월 가고 / 아아 편안하다” 이 고백은 극복의 선언이 아니라, 통과의 결과다. 모든 것을 지나온 뒤에야 비로소 도달하는 평온이다. 특히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는 문장은 이 시의 결론이다. 삶의 끝에서 인간은 더 이상 쌓지 않는다. 외려 덜어내며, 가벼워진다.

이 작품은 거대한 서사를 쌓아 올린 소설가 박경리가, 마지막에 이르러 도달한 가장 간결한 문장이다. 《토지》가 역사와 인간을 통해 세계를 확장한 작품이라면, 이 시는 그 모든 확장의 끝에서 다시 자기 자신에게로 수렴하는 언어다.

《옛날의 그 집》은 한 장소에 대한 기억이 아니라, 한 인간이 평생을 살아내며 도달한 존재의 마지막 방이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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