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

4월, 보이지 않는 문장이 먼저 쓰인다 ㅡ청람 김왕식

4월, 보이지 않는 문장이 먼저 쓰인다 2026.04.01
4월, 보이지 않는 문장이 먼저 쓰인다

ㅡ청람 김왕식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4월, 보이지 않는 문장이 먼저 쓰인다

깊은 흙 속에서 오래 접어 두었던 숨 하나가 아직 이름을 갖지 못한 채 자기 안쪽으로만 흐르고 있을 때

비는 하늘이 아니라 시간의 뒤편에서 먼저 온다

젖는 것은 흙이 아니라 굳어 있던 기다림의 결

말하지 않는 것이 가장 깊이 닿는 방식이라는 듯 봄비는 소리 대신 스며드는 쪽을 택한다

단단히 잠겨 있던 계절의 이음새에 아주 작은 틈 하나

그 틈은 부서짐이 아니라 지나갈 수 있게 열어 둔 길

그리하여 빛은 아직 오지 않았는데 먼저 색이 태어난다

연둣빛이라는 가장 연약한 결심이

어둠의 가장 안쪽에서 자기 자신을 밀어 올린다

씨앗은 자신을 지키는 방식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배운다

그래서 열리는 쪽을 선택한다

찢어지는 것이 아니라 풀리는 방식으로

부서지는 것이 아니라 나누어지는 방식으로

뿌리는 아래로 더 깊어지고 싹은 위로 더 가벼워지며

서로 반대의 방향으로 하나의 생을 완성해 간다

이때 어둠은 더 이상 막힘이 아니라 버티게 하는 자리

빛은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견딘 만큼 스며드는 것이다

하여 4월은 무너뜨리는 달이 아니라

스스로를 통과하도록 조용히 허락하는 달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시작된 아주 오래된 다정함 하나가

마침내 형태를 얻어

꽃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닿는다

ㅡ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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