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 와일드를 지나 ㅡ청람 김왕식
오스카 와일드를 지나 2026.04.06
ㅡ청람 김왕식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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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앞의 문장 — 오스카 와일드를 지나
청람 김왕식
이름 하나 빛으로 먼저 쓰이고 그 뒤에 시간이 따라붙었다
말은 꽃보다 먼저 피었고 문장 하나가 지나갈 때마다 세상의 시선이 그 자리에 머물렀다
형식은 점점 더 정교해지고 삶은 그 위에 올려져 하루조차 하나의 장면처럼 고르게 다듬어졌다
그러나 지나치게 완성된 문장에는 숨이 오래 머물지 않는다
어느 날 문장이 찢어졌다
빛으로 쓰이던 단어들이 누런 색으로 바래고 박수는 돌처럼 식어 아무 소리도 남기지 않았다
남겨진 것은 차갑게 닫힌 시간과 사방이 막힌 공간
누렇게 뜬 벽 앞에서 하루가 한 줄씩 떨어지고
거울도 없는 자리에서 얼굴은 점점 지워지고 손은 마르고 눈빛은 깊어졌다
그곳에서 문장은 다시 시작되었다
꾸밀 수 없는 언어 숨길 수 없는 생각
지워지지 않는 고통이 종이 대신 벽에 스며들었다
부서진 문장들이 천천히 이어지고
잿빛 시간 속에서 한 줄 한 줄 불씨처럼 살아났다
아름다움은 더 이상 장식이 아니었고
고통은 피할 수 없는 재료가 되어
서로를 태우며 하나의 문장을 완성해 갔다
그 문장은 빛나지 않았으나 꺼지지 않았다
누런 벽 앞에서 초췌한 한 사람이
마지막까지 남겨야 할 한 줄을 붙들고
지워질 수 없는 방식으로 자신을 써 내려갔다
세상은 보지 않았으나 문장은 계속되었고
침묵은 오히려 더 또렷한 언어가 되어
그의 안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하여 삶은 더 이상 연출되지 않았고
남은 것은 불타고 있는 문장 하나
끝내 꺼지지 않는 한 인간의 예술이었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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