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

창 밖 봄 ㅡ 청람 김왕식

창 밖 봄 2026.04.15
창 밖 봄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창 밖 봄

봄은 창 밖에 있었다. 방 안은 아직 겨울이었다. 달삼은 문턱 앞에 서 있었다. 문은 반쯤 열려 있었지만, 그 안으로 발을 들이는 일은 쉽지 않았다.

두어 평 남짓한 방이었다.

오래된 벽지는 색이 바래 있었고, 군데군데 벗겨진 자리는 마치 세월이 손톱으로 긁어낸 흔적처럼 드러나 있었다. 방 안에는 시간이 쌓여 있었다. 쌓여서 굳어버린 공기, 움직이지 않는 날들의 무게가 눌러앉아 있었다. 그 한가운데 간이침대가 놓여 있었다. 침대 위에는 아버지, 춘섬 씨가 누워 있었다.

달삼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몸이 낯설어서가 아니었다. 너무 잘 알아서였다. 그 몸이 어디서 어떻게 닳아왔는지, 어떤 시간 속을 지나왔는지, 달삼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평생을 길 위에서 살았다. 5일장이 서는 날이면 새벽부터 일어나 짐을 꾸렸고, 해가 뜨기 전에 길을 나섰다. 산을 넘고 들을 건너며 장터를 향해 걸었다. 비가 와도 걸었고, 눈이 와도 걸었다. 여름에는 등에 맺힌 땀이 옷을 적셨고, 겨울에는 입김이 앞을 가렸다. 그래도 걸었다. 멈추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처럼, 늘 다음 장터를 향해 걸었다.

그의 다리는 땅을 기억하고 있었고, 그의 어깨는 무게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 다리는 가만히 놓여 있었다. 한 번도 멈춘 적 없던 다리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 채 침대 위에 얹혀 있었다. 어깨 또한 가볍게 내려앉아 있었다. 짐을 내려놓은 것이 아니라, 짐을 질 힘이 사라진 모습이었다. 달삼은 문틀을 잡고 서 있었다. 손에 힘이 들어갔다.

병원에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돈이 먼저 끝났다. 약보다, 시간보다, 계절보다 먼저 바닥난 것은 병원비였다. 의사는 더 지켜봐야 한다고 했지만, 지켜볼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달삼은 아버지를 집으로 모셔왔다.

집이라고 부르기에도 좁은 곳이었다. 몸 하나 눕히면 남는 공간이 거의 없었다. 침대와 작은 탁자, 그리고 벽에 붙은 창 하나. 그게 전부였다. 그 창이 세상과 이어진 유일한 길이었다.

달삼은 시선을 들어 창을 보았다. 창밖에는 햇살이 번지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어딘가에서 꽃잎이 흔들리는 듯한 기척이 느껴졌다.

봄이었다.

분명 봄이 와 있었다. 그러나 그 빛은 방 안으로 깊이 들어오지 못했다. 창을 통해 들어온 빛은 바닥에 닿기도 전에 힘을 잃고 퍼졌다. 마치 이 방의 시간에 눌린 것처럼, 빛은 조용히 흩어졌다.

달삼은 그 빛을 한참 바라보다가, 천천히 발을 떼었다. 삐걱거리는 마룻바닥이 작은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는 발걸음을 멈췄다. 혹시라도 아버지의 숨을 건드릴까 봐 조심스러웠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침대 곁에 다다랐을 때, 달삼은 숨을 고르듯 멈춰 섰다.

아버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깊게 팬 주름 사이로 세월이 고여 있었다. 햇볕에 그을린 피부는 색을 잃고 옅어졌고, 입술은 말라 있었다. 그러나 그 얼굴에는 여전히 길 위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먼지를 뒤집어쓴 듯한 고단함, 그러나 끝내 버티고 서 있던 사람의 결이 남아 있었다.

달삼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부를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너무 많아서 고르지 못했다.

“아버지…”

겨우 한 마디가 입 밖으로 나왔다. 그 말은 방 안에 오래 머물렀다. 아버지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달삼은 알 수 있었다. 그가 아직 이 방 안에 있다는 것을. 숨이 아주 미세하게, 그러나 분명히 이어지고 있었다.

달삼은 그 자리에 앉지 못하고 서 있었다. 앉는 순간, 이 시간이 끝나버릴 것 같았다. 말을 꺼내는 순간, 무언가 무너질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그저 서 있었다. 창밖에서는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 바람은 장터의 먼지 냄새를 실어오는 듯했고, 어디선가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희미하게 들려오는 듯했다. 아버지가 평생을 따라다녔던 소리였다. 달삼은 다시 창을 바라보았다. 봄은 분명 저기 있었다. 그러나 이 방 안까지 들어오기에는 아직 길이 너무 멀어 보였다.

아버지는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숨은 얇아졌고, 들고 나는 기척조차 희미해져 있었다. 눈은 자주 감겼다. 감긴 눈꺼풀 아래에서 시간이 천천히 흐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멈춰 있는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런데도 달삼은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듣고 있다는 것을.

사람은 몸보다 먼저 마음이 떠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달삼은 그 옆에서 배워가고 있었다. 말은 닿지 않아도, 기척은 닿는다는 것을. 그래서 그는 말을 걸었다. 응답을 기대하지 않으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아버지, 오늘 장 서는 날이에요.”

조용히 내놓은 말이었다. 그 말은 방 안에서 금방 사라지지 않았다. 벽에 부딪혀 되돌아오듯, 공기 속에 머물렀다.

그때였다. 아버지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그것은 움직임이라기보다, 기억이 건드려진 흔적에 가까웠다. 달삼은 그 작은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오늘 같은 날이면, 일찍 나가셨죠.”

그는 말을 이었다.

“해 뜨기도 전에 짐 싸서… 길 나서고… 산 넘고, 들 건너고…”

말을 하다 보니, 눈앞에 장면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의 아침이었다. 아직 해가 들지 않은 새벽, 아버지는 이미 마당에 서 있었다. 짐을 묶고, 어깨에 걸치고, 아무 말 없이 길을 나서던 모습.

달삼은 문간에 서서 그 등을 바라보곤 했다. 그 등은 늘 멀어지는 쪽에 있었다.

“사람 많았겠죠. 시끌시끌하고… 값 흥정하고… 막걸리 한 사발 나누고…”

그는 말을 이어갔다. 그러다 문득 멈췄다. 그 장면 속에는 늘 아버지가 있었지만, 그 안에 자신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언제나 길 위에 있었고, 집은 늘 잠시 머무는 자리였다. 집이라는 것은, 그에게 쉼이 아니라 다음 길을 준비하는 곳이었다.

삶은 늘 떠나는 쪽에 가까웠다. 그래서 달삼은 한 번도 아버지에게 “왜 그렇게 사느냐”라고 묻지 못했다. 묻기도 전에 이미 답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살아야만 했던 사람의 삶이었다. 그런 사람이 이제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는 자리에 누워 있었다. 달삼은 시선을 내려 아버지의 다리를 바라보았다. 그 다리는 수없이 많은 길을 지나온 다리였다. 비를 맞으며 진흙길을 걷고, 눈길에 미끄러지면서도 다시 일어나 걸었던 다리였다. 여름날 달궈진 길 위에서, 발바닥이 타들어가도 멈추지 않았던 다리였다.

그 다리가 지금은 미동도 없었다. 그 위에 얹힌 시간 또한 멈춰 있는 듯 보였다. 달삼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창을 바라보았다. 창밖에는 봄이 깊어가고 있었다.

산언덕에는 진달래가 번져 있었다. 붉은빛이 퍼져 나가며, 마치 누군가 오래 참아온 마음을 한꺼번에 풀어놓은 듯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꽃잎이 흔들렸고, 그 흔들림은 이쪽까지 전해지는 것 같았다.

어디선가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분명하지 않았다. 바람 소리인지,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인지, 아니면 멀리서 울리는 메아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귀를 기울이자,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장터의 소리였다. 사람들이 부르는 소리, 값을 흥정하는 소리, 웃음이 섞인 말소리. 그 모든 것이 바람을 타고 희미하게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그 소리는 낯설지 않았다. 아버지가 평생을 따라다니던 소리였다. 달삼은 창가로 한 걸음 다가섰다. 그 소리를 더 가까이 듣고 싶어서였다. 아니, 그 소리를 아버지에게 전해주고 싶어서였다.

그는 창문을 조금 더 열었다. 바람이 들어왔다. 따뜻한 바람이었다. 그 바람 속에는 먼지 냄새도 있었고, 흙냄새도 있었고, 꽃 냄새도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섞여 있었다. 달삼은 그 바람을 손으로 가만히 가리며, 아버지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버지…”

그는 다시 불렀다. 이번에는 조금 더 낮은 목소리였다.

“밖에… 장 서는 소리 들려요.”

아버지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나 달삼은 느낄 수 있었다. 그 소리가, 그 바람이, 지금 이 방 안까지 들어와 아버지의 오래된 시간과 맞닿고 있다는 것을. 그 순간, 이 작은 방은 더 이상 좁지 않았다.

수십 년의 길이, 수백 번의 장터가, 이 한 공간 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달삼은 그 자리에 서서, 말없이 그 시간을 함께 듣고 있었다.

어느 날, 숨의 결이 달라졌다. 그 변화는 크지 않았다. 소리도 없었고, 눈에 띄지도 않았다. 그러나 달삼은 알아챘다. 오래 곁에 있어온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아주 미세한 균열 같은 것이었다. 아버지의 숨이 더 얇아졌다.

이전에는 느리게나마 이어지던 호흡이, 이제는 한 번씩 끊어지는 듯했다. 들숨과 날숨 사이에 긴 공백이 생겼다. 그 공백은 점점 길어졌고, 그 사이에서 시간이 멈춘 듯 고요가 내려앉았다. 달삼은 숨을 죽이고 그 리듬을 따라갔다.

하나, 그리고 기다림.

둘, 다시 기다림. 그 기다림이 점점 길어질수록, 그의 가슴은 조여왔다.

그는 손을 뻗어 아버지의 가슴 위에 살짝 올려보았다. 미세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아직은, 아직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실 같은 것이었다. 달삼은 손을 거두지 못했다. 그대로 얹어둔 채, 숨을 함께 세고 있었다.

방 안은 안온했다. 밖에서 들려오던 소리도, 바람의 기척도 이 순간만큼은 멀어져 있었다. 모든 것이 멈춘 듯, 오직 이 방 안에 남아 있는 것은 아버지의 숨뿐이었다. 그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약을 더 먹일 수도 없었다.

병원으로 다시 데려갈 수도 없었다. 돈은 이미 바닥났고, 시간은 그보다 먼저 끝나가고 있었다.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 사실이, 가장 견디기 힘들었다. 달삼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 쪽으로 걸어갔다.

발걸음이 무겁게 느껴졌다. 마치 바닥이 발을 붙잡는 것 같았다. 창밖에는 여전히 봄이 있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는 듯, 햇살은 밝았고, 바람은 부드러웠다.

진달래는 더 붉어졌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장터의 소리는 오히려 더 또렷해진 듯했다. 사람들은 여전히 살아가고 있었다.

그 사실이 이상하게도 잔인하게 느껴졌다. 이 방 안에서는 한 사람이 생의 끝을 향해 가고 있는데, 창밖에서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봄이 깊어지고 있었다. 달삼은 창틀을 꽉 잡았다.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등의 핏줄이 도드라졌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무언가를 붙잡고 싶었다. 시간을 붙잡고 싶었고, 숨을 붙잡고 싶었고, 아버지를 붙잡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손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그 말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자신에게조차 닿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조금만… 더…”

그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말을 꺼내는 순간,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스스로 알았기 때문이다.

조금만 더 무엇을. 조금만 더 살아달라는 것인지, 조금만 더 함께 있어달라는 것인지, 아니면

조금만 더 시간을 달라는 것인지. 그는 그 문장을 끝내지 못했다.

대신 고개를 들었다. 창밖의 빛이 눈에 들어왔다. 그 빛은 너무도 평온했다.

그 평온함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아프게 다가왔다. 달삼은 갑자기 움직였다.

창을 더 크게 열었다. 바람이 한 번에 밀려 들어왔다. 따뜻한 공기가 방 안을 스쳤다. 그는 그 바람을 등지고 서서 손으로 햇살을 가리듯 모았다. 그리고 돌아섰다. 아버지에게로 다가갔다.

“아버지…”

이번에는 조금 더 또렷한 목소리였다. 그는 손으로 창밖을 가리켰다.

“밖에… 봄이에요.”

말을 하면서도,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이 말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 빛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미 늦은 것은 아닐까.

그 생각이 스쳤다.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는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움직임이 없었다. 눈은 감겨 있었고, 입술은 굳어 있었다. 달삼의 숨이 흔들렸다. 그는 더 가까이 다가갔다.

“아버지…”

이번에는 거의 울음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봄이 왔어요…”

그 말은 부르는 말이 아니라, 매달리는 말이었다. 그는 그 자리에 서서,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며 기다렸다.

숨이 이어지기를, 눈이 떠지기를, 그 한 마디가 다시 돌아오기를. 그러나 시간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방 안에는 다시 고요가 내려앉았다. 그 고요 속에서 달삼은 처음으로 알았다. 이제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그 사실이 그를 무너뜨리고 있었다.

그 순간은 아주 늦게 왔다. 달삼이 거의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고 느낀 바로 그때였다. 더는 붙잡을 힘도, 부를 말도, 기대할 시간도 남아 있지 않다고 여겼을 때, 방 안의 공기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처음에는 착각인 줄 알았다. 달삼은 눈을 깜빡였다. 숨을 멈추고 다시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가슴이 아주 미세하게 들썩였다. 끊어진 줄 알았던 호흡이 다시 이어지고 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다가가야 한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오직 바라보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다. 그때, 아버지의 손가락이 아주 조금 떨렸다.

마치 먼 길 끝에서 누군가를 알아보려는 듯, 아주 조심스럽게, 그러나 분명하게 움직였다. 달삼의 심장이 세게 뛰기 시작했다.

“아버지…”

그의 목소리는 떨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한 걸음 다가갔다. 그리고 또 한 걸음. 침대 곁에 다다랐을 때, 그는 무릎을 굽혀 앉았다. 눈앞에서 아버지의 얼굴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굳어 있던 입술이 아주 느리게 풀리고 있었다. 그 변화는 눈으로 보이는 것보다 느껴지는 것이 더 컸다. 달삼은 숨을 죽였다.

지금 이 순간이 모든 시간의 끝인지, 아니면 시작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손을 뻗었다. 아버지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차가웠다. 그러나 완전히 식지는 않았다. 그 온기가 아직 남아 있었다.

그때였다. 아버지의 눈이 아주 천천히 열렸다. 그 눈은 예전의 눈이 아니었다. 길 위를 걸으며 세상을 보던 눈도 아니었고, 장터에서 사람을 헤아리던 눈도 아니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지나온 뒤에야 남는 눈이었다. 깊고, 고요하고, 그러면서도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눈이었다. 달삼은 말을 잊었다. 그저 그 눈을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시선이 조금씩 움직였다.

그 끝에는 창이 있었다. 창밖의 빛이 그 눈동자에 닿고 있었다. 햇살이 번졌다. 그 빛은 강하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했다. 그 빛이 아버지의 얼굴 위로 조용히 내려앉았다. 달삼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아버지의 입술이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말이 되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다. 숨이 모이고, 다시 흩어지고, 또다시 모이는 그 반복 속에서 마침내 한 문장이 태어났다.

“……봄이 왔구나.”

그 말은 크지 않았다. 그러나 그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아니, 그 방을 넘어 달삼의 마음 깊은 곳까지 번져갔다. 그 한 마디에 모든 시간이 담겨 있었다.

비를 맞으며 걸어온 길, 눈 속을 헤치며 넘은 고개,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지나던 장터의 소리, 그리고 지금 이 자리까지 이어진 모든 삶이 그 한 문장 안에 들어 있었다.

달삼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참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그저 멈출 수 없었다. 눈물은 조용히, 그러나 끊임없이 흘렀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해야 할 말이 없었다. 아버지가 이미 모든 말을 다 해버렸기 때문이다.

그 순간 달삼은 알았다. 봄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누군가의 마지막 숨과 함께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라는 것을.

창밖에서는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 바람은 이 방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아버지의 얼굴 위에 아주 가볍게 내려앉았다. 마치 긴 길을 걸어온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건네는 조용한 인사처럼.

그날 밤은 이상하게도 조용했다. 늘 그렇듯, 방 안은 작았고 공기는 무거웠다. 그러나 그 무게가 더 이상 짓누르지 않았다. 낮 동안 이 방을 가득 채우던 말 한마디가, “봄이 왔구나”라는 그 한 문장이, 아직도 공기 속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달삼은 침대 곁에 앉아 있었다. 아버지는 다시 눈을 감은 채였다. 숨은 이어지고 있었지만, 낮과는 달랐다. 더 얇고, 더 길고, 더 멀어 보였다. 마치 한 번씩 숨을 쉴 때마다, 이쪽이 아니라 저쪽으로 조금씩 가까워지는 듯했다. 달삼은 손을 뻗어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그 손은 여전히 차가웠다. 그러나 낮보다 덜 낯설었다. 그 온기를 붙잡으려는 마음도, 이제는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붙잡는다고 붙잡히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는 알 것 같았다.

그는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벽시계는 있었지만, 시계의 숫자는 이 방 안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숨이 한 번 이어질 때마다 그것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두려움은 크지 않았다. 낮에 들었던 그 한 마디 때문이었다.

“봄이 왔구나.”

그 말은 죽음을 향한 말이 아니었다. 살아온 모든 시간을 건너온 사람이, 마지막으로 확인하는 삶의 문장이었다. 그래서 달삼은 더 이상 울지 않았다. 그저 앉아서, 그 말을 되새기고 있었다.

밤이 깊어지자 창밖의 소리도 잦아들었다. 장터의 소리는 사라지고, 바람도 잠잠해졌다. 그러나 완전히 고요하지는 않았다. 어디선가 작은 기척이 있었다. 풀잎이 스치는 소리인지, 먼 데서 들려오는 발걸음인지, 아니면 단지 밤의 숨결인지 알 수 없는 소리였다.

달삼은 고개를 들어 창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창은 여전히 열려 있었다. 낮에 열어둔 그대로였다. 그는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바깥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어둠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 수 있었다.

봄이었다. 보이지 않아도 느껴지는 계절이었다. 달삼은 한 손으로 창틀을 잡았다. 차가운 나무의 감촉이 손바닥에 닿았다.

그는 잠시 그 자리에 서 있다가, 다시 돌아섰다. 아버지는 여전히 누워 있었다. 얼굴은 낮과 다르지 않았다. 고요했고, 평온했다.

달삼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은 이미 다 끝났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아버지의 손을 잡은 채 가만히 숨을 맞추고 있었다.

하나, 그리고 기다림.

둘, 또 기다림.

그 기다림 속에서 시간은 더 이상 흐르지 않는 것 같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달삼은 문득 숨의 결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의 가슴을 바라보았다. 움직임이 있는지, 없는지, 그는 한동안 확인하지 못했다.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기다렸다. 숨이 이어지기를. 또 한 번 그 미세한 움직임이 나타나기를. 그러나 그 순간은 쉽게 오지 않았다.

방 안은 고요했다. 너무 고요해서 오히려 무엇인가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달삼은 손에 힘을 주었다. 아버지의 손을 더 단단히 잡았다. 그 손은 이제 거의 움직임이 없었다. 그러나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달삼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낮의 장면을 떠올렸다. 햇살이 들어오던 순간, 눈이 열리던 순간, 그리고 그 한 마디.

“봄이 왔구나.”

그 말은 지금도 여전히 이 방 안에 남아 있었다. 달삼은 천천히 눈을 떴다. 창밖은 아직 어두웠다. 그러나 그는 알았다. 이 어둠이 지나면 다시 빛이 올 것이라는 것을.

그 빛이 이 방 안에도 다시 들어올 것이라는 것을. 그때 아버지가 이곳에 있을지, 아니면 이미 먼 길을 떠났을지, 그는 알 수 없었다.

그는 그저 지금 이 순간을 붙들고 있었다. 숨과 숨 사이의 아주 얇은 시간 위에서. 그리고 그 위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밖에서는 어딘가에서 새 한 마리가 울었다. 아주 멀리서, 그러나 분명하게. 그 소리는 어둠을 가르고 들어왔다. 달삼은 그 소리를 들으며 다시 창을 바라보았다.

아직은 보이지 않는 빛을 향해, 아직 오지 않은 아침을 향해, 그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문득, 입술 사이로 아주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버지… 봄이 왔어요.”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그 말은 허공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마치 누군가 조용히 듣고 있는 것처럼.□

ㅡ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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