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

오월이 왔는데 ㅡ청람 김왕식

오월이 왔는데 2026.04.30
오월이 왔는데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오월이 왔는데

오월이 왔다. 달력 위의 숫자가 바뀐 것뿐인데, 공기의 결이 다르다. 사월이 흘려보낸 것들이 아직 완전히 가라앉지 않았는데도, 오월은 이미 제 자리에서 숨을 고르고 있다. 계절은 늘 그렇게 앞서 간다. 사람의 마음이 따라잡기도 전에,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는 시간.

오월은 단순히 ‘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준비된 시간이다. 사월을 지나며 무엇을 견디고 무엇을 놓아버렸는지, 그 모든 흔적 위에 서서 맞이하게 되는 시간이다.

하여, 같은 오월이라도, 누구에게는 가벼운 봄이고, 누구에게는 오래 버텨낸 뒤에야 마주하는 깊은숨과도 같다.

사월은 꽃으로 시작해 꽃으로 끝났다. 피고 지는 일이 반복되었고, 그 사이에 사람의 마음도 함께 흔들렸다. 화사함은 있었으되 오래 붙잡을 수는 없었고, 남은 것은 생각보다 담담한 공허였다. 밋밋하고 무덤덤하게 흘러간 시간, 그러나 그 안에서 분명히 무언가는 지나갔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 안쪽에서는 작은 균열과 미세한 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오월은 그 균열 위에 서 있다. 이 계절은 밝기만 한 계절이 아니다. 오히려 어딘가 긴장되어 있다. 아직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시간, 아직 끝나지 않은 질문들, 여전히 엉켜 있는 현실 위에서 오월은 조용히 숨을 고른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 또한 그러하다. 몇 해에 걸쳐 이어진 혼란과 뒤틀림 속에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조차 쉽게 말할 수 없게 된 시간들. 가치가 흔들리고, 기준이 무너지고, 말과 행동이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가는 현실 속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조용히 견디고 있었다.

그 견딤은 크지 않다. 눈에 띄지 않는다. 오래 이어진다. 말하지 않지만 포기하지 않고, 드러내지 않지만 물러서지 않는다. 오월은 바로 그런 사람들의 시간이다. 격하게 외치지 않아도, 이미 방향을 잃지 않고 서 있는 사람들의 시간.

오월은 하나의 얼굴만을 지니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오월은 푸르름이다.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의 색이고, 숨을 깊이 들이쉴 수 있는 계절이다. 나무가 잎을 틔우듯, 사람 또한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믿게 만드는 시간이다. 또 다른 누군가에게 오월은 다르다.

그 계절은 기억을 흔들고, 잊히지 않는 시간을 되살린다. 피를 토하듯 견뎌야 했던 날들, 말로 다 꺼내지 못한 상처들이 이 계절에 다시 숨을 얻는다. 같은 햇살 아래에서도 어떤 이는 웃고, 어떤 이는 고개를 떨군다.

오월은 밝기만 한 계절이 아니다. 희망과 아픔이 함께 서 있는 시간이다. 살아남은 자의 안도와, 아직 끝나지 않은 슬픔이 같은 하늘 아래에서 나란히 숨 쉬는 계절이다. 그럼에도 오월은 멈추지 않는다.

아픔을 외면하지도, 희망만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다만 있는 그대로의 시간을 받아들이게 한다. 견뎌온 것과 남아 있는 것을 함께 안고, 다시 한 걸음을 내딛게 한다.

오월은 ‘기다림’이 아니다. 그것은 준비된 상태다. 무엇인가를 이루겠다는 성급한 결심이 아니라, 이미 지나온 시간 속에서 다져진 마음의 자리다. 오월은 그 자리에 조용히 도착한다.

돌이켜 보면, 사람은 늘 반대 방향으로 서려한다. 흔들리면 버티려 하고, 무너지면 감추려 한다. 시간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결국 지나온 모든 것들은 사람 안에 남아, 어느 순간 새로운 얼굴로 드러난다. 오월은 그 드러남의 계절이다.

이 계절에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말이 아니다. 오히려 덜어내는 일이다. 불필요한 판단을 내려놓고, 서두르던 마음을 조금 늦추고, 이미 지나온 시간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일. 그렇게 할 때,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다. 사월이 남긴 자리, 그리고 오월이 들어설 자리.

오월이 왔는데,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겉의 풍경일 뿐이다. 안쪽에서는 이미 변화가 시작되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방향으로, 그러나 분명히.

시간은 언제나 조용히 움직인다. 큰 소리로 선언하지 않고, 다만 제 자리를 지키며 흐른다. 오월도 그렇다. 그저 와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와 있음’이 이미 하나의 변화다.

오월은 묻지 않는다. 대신 보여준다. 지나온 시간이 어떻게 쌓였는지, 사람이 무엇으로 버텨왔는지, 앞으로 무엇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오월이 왔다.

이제 남은 것은, 그 서로 다른 얼굴의 시간을 외면하지 않고, 그 앞에 안온히 서는 일이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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