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변수남 시인의 시《바람 없는 바람》을 읽다

변수남 시인의 시《바람 없는 바람》을 읽다 2026.05.02
변수남 시인의 시《바람 없는 바람》을 읽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바람 없는 바람

시인 변수남

벌겋게 달궈진 이빨로 가차 없이

정강이를 물어뜯는 이리 개미 숨소리에도 놀라 혼이 다 빠져버리는 청개구리 동물이라면 그대는 어떤 동물이나

물보라 일렁이는 바다에 만 척의 배를 흉용히 침몰시키는 돌개바람 분홍빛 진달래 꺾는 처녀애 치마를

살랑살랑 들어 올리는 산들바람 바람이라면 그대는 어떤 바람이나

나는 움직임 없는 무엇이 되어

시냇물 돌돌대는 오두막에 앉아 쥘부채에 앉은 별님 달님과 함께 놀고 있으리, 밤에서 낮까지 바람 없는 바람이 되어서

존재를 스치는 무형의 힘 — 변수남 시인의 시《바람 없는 바람》을 읽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바람 없는 바람, 존재하지 않음으로 가장 깊이 존재하는 것, 이 시의 제목은 그 역설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다.

“바람 없는 바람.” 이는 부재의 선언이 아니라, 존재 방식의 전환이다. 바람은 본래 보이지 않는다. 하나, 우리는 흔들림을 통해 그것을 안다. 이 시는 그 흔들림마저 거두어들인다. 감지되지 않음에도 작용하는 힘, 움직이지 않음으로 더 깊이 스며드는 상태. 이 역설은 힘의 소멸이 아니라, 힘의 정제이며, 궁극적으로는 힘의 완성이다.

시의 전개는 이 역설에 도달하기 위한 일종의 통과 의례처럼 구성되어 있다. 첫 연의 이리는 공격의 극단이며, 청개구리는 공포의 극단이다. 물어뜯는 힘과 놀라 흩어지는 생명. 이 두 극은 인간 내면의 양극을 드러낸다. 우리는 누군가를 향해 날을 세우기도 하고, 동시에 사소한 흔들림에도 무너지는 존재이기도 하다. 시인은 이 양극을 단정하지 않고 나란히 세운다. 그 병치는 판단이 아니라 인식이다.

이어지는 바람의 이미지 또한 같은 구조를 따른다. 만 척의 배를 가라앉히는 돌개바람과, 진달래를 스치는 산들바람. 동일한 이름 아래 서로 다른 결의 힘이 공존한다. 여기서 시인이 던지는 질문, “그대는 어떤 바람이나”는 단순한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태도에 대한 근원적 질문이다. 힘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가 아니라, 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갈 것인가를 묻는다.

마침내 시는 선택의 차원을 넘어선다. 마지막 연에서 시인은 어떤 것도 택하지 않는다. 이리도 아니고, 청개구리도 아니며, 돌개바람도 산들바람도 아니다. 대신 그는 ‘움직임 없는 무엇’이 되기를 자처한다. 여기서 역설은 비로소 구체화된다. “바람 없는 바람”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존재하는 힘, 드러나지 않으면서 작용하는 영향, 개입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것에 스며드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것은 동양적 사유의 깊은 층위와 맞닿아 있다. 무위(無爲)의 상태, 비움으로 충만에 이르는 길, 힘을 행사하지 않음으로 더 큰 질서를 이루는 방식. 시인은 이를 철학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오두막에 앉아 시냇물 소리를 듣고, 별과 달과 함께 시간을 나누는 장면으로 형상화한다. 그 고요는 정지가 아니다. 외려 모든 움직임을 품고 있는 평형이며, 존재의 가장 안정된 상태다.

변수남 시인의 시적 태도는 이 지점에서 더욱 빛난다. 겸손한 삶의 자세와는 달리, 시에 있어서는 한 치의 흔들림도 허용하지 않는 고집. 그 고집은 과시가 아니라 切磋琢磨다. 언어를 더하기보다 덜어내며, 의미를 넓히기보다 깊게 파고드는 방식. 그의 시가 견고한 이유는 바로 이 절제에 있다. 단단함은 쌓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를 제거한 뒤 남는 핵에서 비롯된다.

국어교사로서의 삶 또한 이 시와 닮아 있다. 참된 가르침은 드러내는 데 있지 않고, 스스로 깨닫게 하는 데 있다. 학생들 곁에서 보이지 않는 바람처럼 머물며, 방향을 잃지 않도록 돕는 존재. 목포라는 자리에서 묵묵히 후학을 길러내고, 동시에 시인으로서의 역량을 다져온 그의 시간은 크지 않으나 깊다. 넓게 번지기보다 오래 스며드는 힘, 그것이 그의 삶과 문학을 관통한다.

이 시가 끝난 자리에서 독자는 다시 묻게 된다. 나는 어떤 바람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흔들며 존재를 증명하는 바람인가, 아니면 스치며 흔적을 남기는 바람인가. 혹은 그 모든 바람을 지나, 존재를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더 깊이 작용하는 상태에 이르렀는가. 시인은 끝내 답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하나의 방향을 남긴다. “바람 없는 바람.” 그것은 사라짐이 아니라, 가장 깊은 방식의 머묾이다.□

□ 바람을 넘어, 바람으로 — 변수남 시인께 드리는 시

말이 닿기 전에 이미 고요로 서 계신 분

소리보다 먼저 침묵을 길어 올리는 손끝에서 한 줄의 시는 세상을 흔들지 않고도 깊이 흔든다

거센 바람이 세상을 휩쓸 때 선생은 바람의 편에 서지 않는다 다만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서 흔들리지 않는 것들을 바라본다

부서지는 것들 곁에서 부서지지 않는 마음 하나 조용히 놓아두는 일 그것이 시라는 것을 몸으로 가르치신 분

겸손은 낮아짐이 아니라 깊어짐이라는 것을 고집은 굳어짐이 아니라 맑아짐이라는 것을

선생의 시는 말한다

드러내지 않아도 이미 스며들고 움직이지 않아도 이미 닿고 있다는 것을

목포의 바다 끝에서 별과 물결을 벗 삼아 한 줄의 언어를 다듬는 시간

그 고요한 노동 위에 세상은 조금 더 따뜻해지고 사람은 조금 더 사람다워진다

오늘도 바람 없는 바람으로

보이지 않게 그러나 가장 멀리 닿고 계신다

ㅡ청람 김왕식

□ 시인들과 함께하고 있는 변수남 시인 ㅡ오른쪽

댓글

로그인 없이 바로 남길 수 있습니다. 나중에 본인이 수정·삭제하려면 이 댓글의 비밀번호를 정해 주세요. 서로 예의를 지켜 주세요.

  1. 불러오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