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콜릿과 소금이 든 노란 봉지 ㅡ이은집 소설가
초콜릿과 소금이 든 노란 봉지 ㅡ이은집 소설가 2026.05.04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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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콜릿과 소금이 든 노란 봉지
청람 김왕식
그날의 만남은 처음부터 조금 이상하게 따뜻했다. 선술집 문을 밀고 들어섰을 때, 이은집 선생은 이미 오래된 문장처럼 그 자리에 앉아 계셨다. 옆에는 여윤동 민조民調 시인이 있었다. 술잔보다 먼저 웃음이 놓였고, 안주보다 먼저 세월이 펼쳐졌다.
이은집 선생은 한평생 교단에서 학생들에게 문학을 가르친 분이다. 그러나 선생의 문학은 교실에만 머물지 않았다. 방송작가로, 소설가로, 한 시대의 안방을 흔들며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문학이 책장 속에서만 숨 쉬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저녁 밥상과 라디오 소리와 텔레비전 화면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음을 몸소 보여주신 분이다.
말씀은 크지 않았다. 그러나 한마디 한마디가 오래된 나무의 그늘 같았다. 조지훈, 정한숙 선생의 문하에서 배운 사람답게, 설명보다 여백을 더 아끼셨다. 어떤 질문에는 답을 주지 않으셨고, 어떤 이야기는 끝을 흐리셨다. 이상하게도 그럴수록 더 많은 것이 들렸다.
선술집에서 우리는 문학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윤동 시인은 특유의 단아한 웃음으로 자리를 부드럽게 했고, 나는 두 스승 사이에서 술보다 더 진한 시간을 마셨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사람은 왜 늙어도 문장을 놓지 않는가. 가르친다는 것은 결국 무엇을 남기는 일인가. 그런 질문들이 술잔 가장자리에서 맴돌았다.
식사가 끝날 무렵 작은 소동이 있었다. 여윤동 선생이 나보다 날렵하게 계산대로 향했다. 나도 뒤질세라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80 노구의 이은집 선생은 이미 그곳에 계셨다. 어디서 그런 기력이 나오는지, 선생은 기어코 우리 둘을 패잔병으로 만들고야 말았다. 우리는 서로 바라보며 웃었다. 제자의 예의는 스승의 완력 앞에서 그날도 장렬히 전사했다.
자리를 옮겨 찻집으로 갔다. 술기운이 가라앉자 말은 더 깊어졌다. 커피 향 사이로 선생의 옛 교단 이야기, 방송국 시절 이야기, 문단의 오래된 이름들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 이야기는 자랑이 아니었다. 살아온 시간을 조용히 펼쳐 보이는 일이었다. 화려한 경력보다 더 크게 다가온 것은, 여전히 사람을 귀히 여기는 태도였다.
이번만큼은 우리도 물러서지 않았다. 커피는 기어코 우리가 계산했다. 거창한 승리는 아니었다. 다만 제자로서 아주 작은 체면 하나를 건진 셈이었다. 선생은 말없이 웃으셨다. 그 웃음 속에는 “그래, 오늘은 그 정도는 봐주마” 하는 듯한 너그러움이 있었다.
헤어질 때 선생은 또 노란 비닐봉지를 슬쩍 건네셨다. 그 안에는 당신의 문집 한 권, 가나초콜릿 하나, 소금 한 봉지가 들어 있었다. 처음 받는 사람이라면 어리둥절할 조합이다. 문학과 초콜릿과 소금이라니. 어느 문예지 부록도 아니고, 어느 제사상도 아닌 이 낯선 삼합 앞에서 나는 매번 웃다가 숙연해진다.
초콜릿은 삶의 단맛일 것이다. 소금은 삶의 짠맛일 것이다. 그리고 문집은 그 둘을 견디고 지나온 사람의 기록일 것이다. 선생은 아무 설명도 하지 않으신다. 설명하지 않으니 더 깊다. 답을 말하지 않으니, 받은 사람이 오래 생각하게 된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노란 봉지가 유난히 가벼우면서도 묵직했다. 그 안에는 책 한 권과 초콜릿 하나와 소금 한 봉지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스승의 마음, 문학의 체온, 오래된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건네는 조용한 당부가 함께 들어 있었다.
진짜 스승은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밥을 사 주고, 커피 한 잔은 제자에게 맡겨 주고, 헤어질 때 노란 봉지 하나를 건넨다.
그리고 그 안에 삶의 단맛과 짠맛을 함께 넣어 둔다. 제자가 언젠가 스스로 알아차리도록.
ㅡ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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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왕식 평론가님!
와우! 그림은 물감으로만 그리는 줄 알았는데 어제 우리 3인의 민남을 언어로 어찌 이리도 생생히 그렸단 말씀인가요?
방송가에서 저의 대학 1년 선배이신 그 유명한 김수현 드라마 작가를 <언어의 마술사>라고 하는데, 여기 문단에도 있어 우리 3인 회동은 신라 시대의 화랑이 된 듯도 합니다.
그리움은 물처럼 고이는 존재! 그날에 우리 다시 만나요!
이은집 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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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이은집 선생님께
새벽의 문장을 받아 들고 한동안 말이 멈추었습니다. 그 글은 편지라기보다, 한 폭의 물빛 같았습니다. 읽는 내내 마음 한켠에 고요히 고여, 쉽게 흩어지지 않았습니다. 과분한 말씀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언어가 무엇을 그려낼 수 있다면, 그것은 그날 함께했던 온기의 덕분입니다.
세 사람이 마주 앉아 나눈 시간은 이미 하나의 결을 이루고 있었고, 저는 그 위에 조심스럽게 손을 얹었을 뿐입니다. 선생님께서 화랑의 비유를 건네주시니, 부끄러움이 먼저 앞섭니다.
그날의 자리는 누군가를 빛내기 위한 장이 아니라, 서로의 시간을 낮게 받아 안는 자리였다고 여깁니다.
바람이 스치듯 지나간 자리에서, 잠시 서로의 온기를 확인했을 뿐입니다. ‘그리움은 물처럼 고인다’는 선생님의 말씀은 제 안에 오래 남아 흐르고 있습니다. 물은 소리 없이 낮은 곳으로 모이듯, 사람의 마음 또한 그렇게 안온히 이어지는 것임을 다시 배우게 됩니다.
문장은 늘 부족하고, 마음은 늘 넘칩니다.
하여, 쓰는 일은 언제나 빚을 지는 일처럼 느껴집니다. 그 빚을 갚지 못한 채 또 한 줄을 얹어가는 것이 글을 쓰는 사람의 운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라는 말씀을 가슴 깊이 품습니다.
그날이 오면, 이번에는 말보다 먼저 침묵으로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이미 다 전해진 것을 굳이 덧붙이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새벽의 맑은 숨결 같은 글, 고맙습니다. 그 여운을 오래 품고 있겠습니다. 늘 건강하게 지내시기를 빕니다.
김왕식 드림
□ 이은집 소설가, 여윤동 민조시인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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