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비명 ― 그가 비워 둔 자리 ㅡ청람 김왕식
묘비명 ― 그가 비워 둔 자리 2026.05.06
― 그가 비워 둔 자리
ㅡ청람 김왕식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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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비명 ― 그가 비워 둔 자리
청람 김왕식
사람이 떠나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지만, 드물게 한 생애 전체를 하나의 문장으로 남기는 이가 있다. 그는 죽음을 앞두고 삶을 정리한 것이 아니라, 삶의 끝에서 비로소 삶을 완성해 갔다.
시한부 석 달. 병원은 시간을 계산했고, 의학은 연장을 제안했지만 그는 다른 길을 택했다. 수술과 항암을 거부한 선택은 체념이 아니라 방향이었다. 남은 날들을 ‘버티는 시간’으로 쓰지 않고 ‘만나는 시간’으로 바꾸려는 의지였다. 그에게 남은 것은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만남의 깊이였다.
그는 매일 사람을 불렀다. 화려한 자리가 아니었다. 작은 식탁, 소박한 차 한 잔, 오래된 의자 하나면 충분했다. 그 자리에서 그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미뤄 두었던 인사를 건네고, 묻어 두었던 마음을 꺼냈다. 미안함은 미안하다고, 고마움은 고맙다고, 오래 쌓인 오해는 그 자리에서 풀어냈다. 때로는 상대가 먼저 울었고, 때로는 그가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그 모든 장면은 비극이 아니라 정리의 질서였다. 떠남을 준비하는 방식이 곧 남겨질 사람들을 위한 배려였다.
그의 시간에는 조급함이 없었다.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서 흔히 보이는 불안 대신, 차분한 호흡이 있었다. “하나님이 아직 준비가 안 되신 모양이다. 나는 준비가 다 되었는데.”라는 말은 원망이 아니라 신뢰였다. 자신의 끝을 스스로 앞당기려 하지 않고, 맡겨진 시간의 마지막 결을 끝까지 받아들이려는 태도였다. 기다림조차 믿음의 일부로 받아들인 것이다.
가족이 물었다. “아버지, 비문을 어떻게 쓸까요.”
그는 잠시 생각한 뒤 짧게 남겼다. “왜 왔소, 내가 여기 없는데.”
이 문장은 농담처럼 들리지만, 그의 삶을 관통하는 통찰이 담겨 있다. 몸이 머무는 자리가 곧 자신이 아니라는 인식, 존재는 흙에 묶이지 않는다는 확신. 그는 죽음을 ‘사라짐’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자리를 옮기는 일, 형식을 벗는 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묘비명은 남겨질 이들을 향한 마지막 배려이자, 삶과 죽음을 동시에 넘는 문장이 되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자리를 비워 두었다. 원망을 남기지 않았고, 집착을 붙잡지 않았다. 관계를 하나씩 매듭지으며, 남은 이들이 짊어질 짐을 가볍게 만들었다. 사랑은 붙드는 힘이 아니라 놓아주는 용기라는 것을 몸으로 증명했다.
그의 죽음은 사건이 아니라 태도였다. 생의 마지막을 향해 걸어가면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질서, 끝까지 사람을 향해 열려 있던 마음. 그래서 그의 삶은 길지 않아도 깊었고, 화려하지 않아도 빛났다.
묘비 위에 남은 문장은 하나지만, 그 문장을 이해하는 데에는 한 생애가 필요하다. 그는 떠났지만, 남겨진 이들의 삶 속에서 오래 머문다. 몸은 묻혔으나 존재는 다른 자리로 옮겨 갔다. 그가 비워 둔 자리는 공허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이 다시 채워야 할 몫으로 남았다.
그가 남긴 것은 한 줄의 말이 아니라 하나의 방식이다. 어떻게 떠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끝까지 사람으로 남을 것인가에 대한 증언이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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