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자리에서 다시 묻는 이름, 문학인 ㅡ청람 김왕식
낮은 자리에서 다시 묻는 이름, 문학인 2026.05.07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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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자리에서 다시 묻는 이름, 문학인
김왕식
문학이라는 이름 앞에 서면, 언제나 한 걸음 물러서게 된다. 그것은 스스로를 낮추려는 의식 때문이 아니라, 그 이름이 지닌 무게를 감당하기에 아직 부족함을 알기 때문이다.
다른 직업은 역할로 설명되지만, 문학인은 존재로 드러난다. 맡은 일을 잘 수행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세계가 있는가 하면, 끝내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세계도 있다. 문학은 후자에 속한다. 문장을 쓴다는 행위는 단순한 기술의 결과가 아니라, 한 인간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가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문학인의 정체성은 쉽게 말해지지 않는다. 그것은 이름으로 얻어지는 것도 아니고, 작품 몇 편으로 완성되는 것도 아니다. 외려 살아가는 방식 속에서 조금씩 드러나고, 때로는 드러나지 않은 채 오래 침잠해 있는 무엇이다.
문학인의 정신적 가치는 바로 그 지점에 있다. 눈에 보이는 성취보다, 보이지 않는 태도에 있다. 세상의 흐름에 쉽게 기대지 않고, 편의에 따라 언어를 바꾸지 않으며, 끝내 자신이 믿는 길을 지키려는 고집. 그 고집은 고독을 동반하지만, 동시에 문학을 문학답게 만드는 마지막 보루이기도 하다.
나이가 들어 문학을 한다는 것은 단순한 취미나 여유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더 깊은 질문을 감당하는 일이다.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무엇을 남길 것인가,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진실한가. 이러한 질문은 젊은 시절보다 더 날카롭게, 더 무겁게 다가온다.
그럼에도 문학을 붙들고 있다는 사실은 하나의 행복이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의 승리다. 세상이 요구하는 속도와 효율에서 한 걸음 비켜서, 여전히 한 문장을 붙들고 있다는 것. 그 문장이 누군가에게 닿을지 알 수 없으면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는 일. 그것은 외부의 인정과는 무관한, 스스로에 대한 작은 승리다.
그러나 그 자리에 서 있을 때마다 마음은 편치 않다. 문학인이라 불리기에, 아직 부족하다는 생각이 먼저 앞선다. 일석 이희승 선생의 ‘딸깍발이 정신’이 떠오른다. “얼어 죽을지언정 겻불은 쬐지 않겠다”는 그 단단한 자존. 타협하지 않는 태도, 스스로를 속이지 않으려는 결기. 지금의 자리에서 그 정신을 떠올리면, 고개가 저절로 숙여진다.
문학을 한다는 말은 쉽게 피력하면서도, 그 정신을 온전히 지키고 있는가를 묻는다면 선뜻 답하기 어렵다.
때로는 안일함에 기대고, 때로는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때로는 문학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있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하여, 문학인이라는 이름은 자부심보다 먼저 자숙을 요구한다. 무엇을 더 쓰기 전에,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먼저 묻게 한다. 문장은 결국 삶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말이 아니라, 더 깊은 침묵일지 모른다. 그 침묵 속에서 자신을 다시 바라보고, 왜 문학을 붙들고 있는지를 묻는 일. 그리고 그 질문 앞에서 조금이라도 정직해지려는 노력.
문학인의 길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을 속이지 않는 데서 시작된다고 믿는다.
오늘도 다짐한다. 문학을 한다고 말하기보다, 문학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ㅡ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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