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

분홍색의 자리는 늘 만원이다 ㅡ청람 김왕식

분홍색의 자리는 늘 만원이다 2026.05.10
분홍색의 자리는 늘 만원이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분홍색의 자리는 늘 만원이다

청람 김왕식

분홍색은

원래 축복의 색이었다

아직 이름도 없는 생명이

세상 쪽으로 천천히 걸어오고 있다는

조용한 신호 같은 것

지하철 한 칸

도시는 작은 꽃 한 송이처럼

그 자리를 남겨 두었다

잠시라도

누군가의 무거운 몸을 먼저 쉬게 하라고

그러나 분홍색은

늘 먼저 지쳐 있는 사람들의 것이다

할머니의 하루가 앉아 있고

아저씨의 피곤이 기대어 있고

꾸벅꾸벅 조는 퇴근길이

두 다리를 길게 뻗고 있다

신문을 접는 손끝마다

생활은 팍팍하고

휴대폰 속 세상은 끝없이 어둡다

그래서인지

분홍색은 늘 만석이다

이 나라에는

임산부가 참 많은 모양이다

좌석 점유율만 보면

아이 울음소리는

벌써 골목마다 넘쳐나야 한다

매 정거장마다

임신 칠 개월쯤 되어 보이는 피로들이

무겁게 내려앉고

배는 없는데

한숨만 만삭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잠깐이면 되잖아요.”

그 잠깐이

몇 정거장을 지나

끝내 종점까지 간다

정작

아이를 품은 사람은

문 앞에서 흔들리는데

분홍색은

한 번도 비워지지 않는다

도시는 늘

출산을 이야기한다

아이를 낳으라고

미래를 살리자고

숫자를 올려야 한다고

그러나

새 생명을 품은 몸 하나

편히 앉힐 자리는

끝내 비워 두지 못한다

배려는 포스터 속에서 웃고

실천은 늘 다음 사람 차례다

모두가 힘들다고 말하는 동안

가장 힘든 사람은

끝내 손잡이를 붙든 채 흔들린다

오늘도 분홍색은 묻는다

정말 임산부가 없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끝내 보지 않으려는 것인지

출산율의 답은

어쩌면 통계청 서류철이 아니라

퇴근길 지하철 한 칸

비워지지 않는

분홍색 자리 위에 놓여 있는지도 모른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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