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

시는 순간의 기술이 아니라 머무름의 예술이다

시는 순간의 기술이 아니라 머무름의 예술이다 2026.05.10
시는 순간의 기술이 아니라 머무름의 예술이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오래 바라보면 보이는 것들 ― 시는 순간의 기술이 아니라 머무름의 예술이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세상은 너무 빨리 지나간다. 사람들은 늘 바쁘고, 눈앞의 풍경들은 대부분 “정보”처럼 소비된다.

길가의 나무도, 늦은 밤 편의점 불빛도, 비 오는 골목 끝에 서 있는 사람의 어깨도 스쳐 지나가는 배경이 되어버린다.

시인은 자꾸 멈춰 선다. 남들이 그냥 지나친 것 앞에서 오래 머물고, 별것 아닌 풍경 하나를 이상하리만큼 오래 바라본다.

왜 그럴까.

시란 결국 “오래 바라보는 힘”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금방 봐서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어느 겨울 저녁 오래된 시장 골목을 걷다가 한 노인을 본 적이 있다. 그는 작은 좌판 앞에 앉아 있었는데 팔 물건보다 침묵이 더 많아 보였다. 사람들은 대부분 그냥 지나쳤다. 나 역시 처음엔 그저 평범한 풍경으로 보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한참 그 노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보이기 시작했다.

굽은 어깨와 손등의 주름, 아무도 오지 않는 시간을 견디는 눈빛, 추위를 이기려고 연신 손을 비비는 움직임 같은 것들.

그 순간 알았다.

아, 시는 바로 여기서 태어나는 것이구나. 보이지 않던 인간의 시간이 보이기 시작하는 순간.

초심자의 시는 대개 빨리 쓰려한다. 느낀 감정을 곧바로 문장으로 옮기고, 눈에 들어온 장면을 즉시 시로 만들고 싶어 한다. 물론 순간의 감각도 중요하다. 그러나 깊은 시는 대부분 오래 바라본 시간 속에서 나온다.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천천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좋은 시인이란 “많이 보는 사람”보다 “오래 보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많이 보는 것은 정보가 되지만, 오래 보는 것은 존재가 된다.

누구나 비 오는 거리를 볼 수 있다. 시인은 그 빗속에서 우산 없이 걷는 사람의 발끝을 본다. 늦은 밤 불 꺼진 가게 유리창에 남은 물방울을 보고, 젖은 신문지 위에 하루의 피로가 내려앉아 있는 것을 느낀다. 그 순간 풍경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간의 삶이 된다.

디카시는 특히 “머무름의 시선”이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디카시는 순간 포착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맞다. 좋은 디카시는 단순히 눈앞의 장면을 찍는 것이 아니다. 그 장면 앞에 오래 머물렀던 사람만이 발견할 수 있는 존재의 떨림을 담아내는 일이다.

낡은 운동화 사진이 있다고 하자. 보통 사람은 그냥 오래된 신발을 본다. 시인은 그 안에서 한 사람의 시간을 읽는다.

그리고 “오늘도 하루는 신발 밑창부터 먼저 닳아가고 있었다” 같은 문장이 태어난다. 짧지만 그 안에는 인간의 피로와 생의 무게가 함께 들어 있다.

좋은 디카시는 찰나 속에서도 긴 시간을 품고 있다. 반면 일반시는 그 시간을 더 깊고 길게 끌고 간다.

계절과 기억, 기다림과 상실을 따라가며 인간 존재를 천천히 열어 보인다.

하여, 좋은 일반시는 읽고 나면 마치 한 사람의 삶 곁에 오래 앉아 있었던 느낌을 남긴다.

나이가 들수록 “오래 바라본다”는 것이 단순한 관찰이 아니라 사랑에 가까운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랑하지 않으면 오래 바라볼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관심 없는 것은 금세 지나친다. 마음이 가는 존재 앞에서는 자연스럽게 오래 머물게 된다.

시는 바로 그 머무름 속에서 태어난다. 삶도 그렇다. 사람은 자기를 오래 바라봐주는 존재 앞에서 비로소 마음을 연다.

대충 듣는 사람보다 끝까지 침묵을 함께 견뎌주는 사람에게 더 깊이 끌린다.

시는 인간의 그런 마음을 닮아 있다. 좋은 시인은 특별한 언어를 가진 사람이 아니다. 세상을 함부로 지나치지 못하는 사람이다. 작은 존재 하나 앞에서도 오래 멈춰 서 있고, 보이지 않던 인간의 시간을 끝내 발견해 내는 사람.

하여, 시란 “보는 기술”이 아니라 “머무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그 오래된 머무름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인간과 세계의 숨겨진 얼굴을 만나게 된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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