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정순영 시인의 《시인의 말》을 읽으며 ㅡ청람 김왕식

정순영 시인의 《시인의 말》을 읽으며 2026.05.13
정순영 시인의 《시인의 말》을 읽으며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시인의 말

시인 정 순 영

시인의 말은 세상 말이 아니지

산과 바다가 주고받는 말

바람과 나무와 계곡 물소리가 주고받는 말이지

시간 안에서 시간 밖으로

시인의 말은 하늘이 알아듣는 말이지

□ 정순영/1974년 <풀과 별> 천료. 시집 ‘시는 꽃인가’ 외 13권. ‘한국시학상’ 외 다수 수상. 부산시인협회 회장, 국제 PEN 한국본부 부이사장, 세종대학교 석좌교수 등 역임. 월간 <한맥문학> 편집고문.

<표현> 2026, 봄호. 제98호

하늘은 왜 시인의 말을 먼저 알아듣는가 — 정순영 시인의 「시인의 말」을 읽으며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산사에 가면 가끔 그런 순간이 있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데도, 무엇인가 이미 다 들은 듯한 고요가 내려앉는 시간.

정순영 시인의 《시인의 말》은 바로 그 침묵의 결에서 태어난 시다. 이 시를 읽고 있으면 언어가 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래 맑아진 영혼에서 스며 나온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시인의 말은 / 세상 말이 아니지”

첫 구절은 짧다. 그 짧음 속에 시인이 평생 품어온 시의 철학이 고요히 들어 있다. 세상의 말은 대개 사람을 설득하려 한다. 높아지려 하고, 드러나려 하고, 자기 존재를 증명하려 한다.

시인의 말은 다르다. 그것은 설명보다 먼저 가슴에 내려앉는다. 소리보다 숨결에 가깝고, 주장보다 떨림에 가깝다.

정순영 시인은 시를 인간의 기술로 보지 않는다. 외려 자연과 우주가 서로 주고받는 오래된 숨결의 일부로 바라본다.

“산과 바다가 / 주고받는 말”

이 대목에 이르면 시는 이미 인간의 언어를 넘어선다. 산은 높다고 말하지 않고, 바다는 깊다고 외치지 않는다. 우리는 그 침묵 속에서 높이와 깊이를 느낀다.

정순영 시인의 시 또한 그렇다. 그의 언어는 화려하게 빛나기보다 오래 젖는다. 비 갠 새벽 흙냄새처럼, 늦가을 억새밭 스치는 바람처럼 조용히 스며든다. 특히 이 시에서 아름다운 것은 ‘낮음’이다. 요즘의 언어들이 지나치게 높아지고 복잡해질수록, 정순영 시인의 시는 더욱 낮은 곳으로 내려간다. 바람과 나무와 계곡 물소리가 서로 건네는 말을 듣겠다는 태도는, 결국 자연 앞에서 자신을 비우겠다는 마음이다.

시인은 세상을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먼저 듣는다. 오래 듣는다. 하여, 그의 시에는 억지가 없고, 과장이 없다. 대신 오래 살아낸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맑은 체온이 있다.

“시간 안에서 / 시간 밖으로”

이 구절은 짧지만 깊다. 인간은 시간 안에서 늙어가지만, 시는 때때로 시간 밖으로 걸어 나간다. 좋은 시 한 편은 십 년 전에도 사람을 울리고, 백 년 뒤에도 누군가의 외로움을 쓰다듬는다.

정순영 시인의 언어가 오래 남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의 시에는 유행의 먼지가 거의 내려앉지 않는다. 대신 오래 닦인 샘물 같은 투명함이 흐른다.

마지막의 “시인의 말은 / 하늘이 알아듣는 말이지”에 이르면 시는 하나의 기도가 된다. 여기서 하늘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다. 인간의 가장 깊은 외로움과 가장 맑은 숨결까지 오래 듣고 있는 거대한 침묵이다. 시인은 그 침묵을 향해 조용히 말을 건네는 사람이다.

정순영 시인의 삶 또한 그의 시와 닮아 있다. 반세기 가까운 세월 동안 시를 써오며 그는 한국 현대시의 한 자리를 묵묵히 지켜왔다. 그의 시에는 조금의 허세도 없다. 오래 비워낸 사람의 맑음이 있다.

해서, 그의 시를 읽고 있으면 독자는 문득 자기 안의 소음까지 천천히 가라앉는 경험을 하게 된다. 좋은 시는 사람을 놀라게 하지 않는다. 사람을 맑게 만든다.

정순영 시인의 《시인의 말》은 바로 그런 시다. 이 시를 읽고 나면 문득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게 된다. 오래 잊고 살았던 바람 소리 하나, 물소리 하나가 가슴속에서 다시 살아난다.

아마 시인이란 세상이 잃어버린 그 낮은 목소리들을 끝내 하늘 쪽으로 데려가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ㅡ청람 김왕식

□ 정순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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