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숲에 어둑한 나무를 바라볼 때 ㅡ청람 김왕식
검은 숲에 어둑한 나무를 바라볼 때 2026.05.15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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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숲에 어둑한 나무를 바라볼 때
청람 김왕식
사람은 밝은 곳에서는 사물을 본다. 어두운 곳에서는 자기 자신을 보게 된다.
해 질 무렵 산길을 걷다가 문득 검게 잠겨가는 숲을 바라본 적이 있다. 낮 동안 초록이던 나무들은 어느새 빛을 잃고 어둑한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가지와 잎은 구분되지 않았고, 숲은 점점 하나의 거대한 침묵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순간 이상하게도 마음이 조용해졌다. 낮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어둠 속에서는 외려 더 또렷해지는 때가 있다. 사람의 외로움도 그렇고, 오래 묻어둔 기억도 그렇다. 밝은 낮에는 바쁘게 살아내느라 미처 들여다보지 못했던 마음의 그림자들이 저녁 숲 앞에서는 슬며시 걸어 나온다.
검은 숲은 조금 사람을 닮았다. 멀리서 보면 모두 하나의 어둠 같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저마다 다른 상처와 다른 결을 지닌 나무들이다. 어떤 나무는 번개를 맞은 흔적을 품고 있고, 어떤 나무는 오래된 덩굴에 몸이 감겨 있다. 또 어떤 나무는 속이 비어가면서도 끝내 쓰러지지 않은 채 겨우 하늘을 떠받치고 있다.
사람도 그렇다. 겉으로는 아무 일 없는 듯 살아가지만, 누구나 자기 안에 하나쯤 검은 숲을 품고 산다. 말하지 못한 슬픔, 돌아갈 수 없는 시간, 끝내 놓지 못한 그리움 같은 것들.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그 어둠을 완전히 지우는 일이 아니라, 그 어둠과 함께 걸어가는 법을 배우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무를 오래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다. 그들은 대개 쉽게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다. 나무는 겉보다 속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키 큰 나무가 반드시 강한 것은 아니다. 비바람을 많이 견딘 나무가 더 단단하다. 사람 또한 많이 아파본 이들이 타인의 눈물을 더 깊이 이해한다.
어둑한 숲에서는 새소리마저 낮아진다. 바람도 함부로 불지 않는다. 세상 모든 것들이 잠시 말을 멈춘 듯한 시간. 그 고요 속에 서 있으면 문득 인간의 욕심이라는 것이 얼마나 시끄러운 것이었는가를 깨닫게 된다.
낮 동안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하려 한다. 더 높이 올라가려 하고, 더 많이 가지려 하고, 더 환하게 빛나려 한다. 숲은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는다. 나무는 자기 자리에서 그저 묵묵히 계절을 견딜 뿐이다. 꽃이 필 때도 요란하지 않고, 잎이 질 때도 변명하지 않는다.
가끔 그런 나무 같은 사람이 부럽다. 조용히 자기 몫의 그늘을 만들며 살아가는 사람. 누군가 쉬어갈 자리를 남겨두고도 생색내지 않는 사람. 햇빛보다 비를 더 많이 맞았으면서도 끝내 푸름을 잃지 않는 사람.
검은 숲을 바라보고 있으면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도 난다. 어머니는 평생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셨다. 늘 자식들 뒤쪽 어둠 속에 서 계셨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면 우리 집에서 가장 큰 나무는 어머니였다. 우리는 그 그늘 아래서 비를 피하고 바람을 견디며 자랐다.
사람은 떠난 뒤에도 오래 남는다. 나무가 베어진 자리에서 한동안 나무 냄새가 사라지지 않듯, 사랑도 그렇다. 오래 품어준 사람의 마음은 세월이 지나도 문득 저녁 숲 같은 시간 속에서 다시 살아난다.
어둠은 두려운 것이 아니다. 어쩌면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밝은 곳에서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어둠 속에서는 비로소 자기 얼굴을 드러낸다. 그리움도, 사랑도, 용서도 그렇다.
해 질 무렵의 숲을 좋아한다. 검은 숲에 어둑한 나무들이 잠잠히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세상은 아직 완전히 차갑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말없이 서 있는 나무 한 그루가 때로는 수많은 말보다 더 깊은 위로가 되기도 하기에.
ㅡ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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