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반짇고리ㅡ청람 김왕식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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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반짇고리
청람 김왕식
장롱 맨 아래 칸을 열다가 나는 오래된 시간 하나를 만졌다
낡은 보퉁이 속 작고 둥근 반짇고리 하나 뚜껑 가장자리는 닳아 있었고
안에는 구멍 뚫린 가죽 골무 하나 색색 실 감긴 실패 몇 개 이빨 빠진 가새 뒤꿈치 해진 양말 서너 켤레가 말없이 들어 있었다
순간 가슴 한쪽이 무너져 내렸다 아, 어머니는 아직 이 안에서 살고 계시는구나
열네 살 꽃도 채 피기 전에 시집와 열여섯에 큰딸을 안고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한평생 부엌 아궁이와 논두렁 사이를 맨발로 건너신 분
젊은 날 나라 잃은 시대의 어둠 속에서 정신대의 그림자까지 밟고 돌아와 눈물 삼킬 틈도 없이 시집살이 속으로 몸을 던지셨다
내리 일곱 남매를 낳고 젖은 기저귀처럼 세월에 자신을 짜내며 사셨다
그러나 삶은 어머니를 가만두지 않았다
서른셋 남편마저 먼저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는 검은 상복보다 더 검은 밤을 가슴속에 입고 사셨다
홀시어머니 모시며 고부간 긴 세월을 버티던 그 손
그 손등 위로는 겨울마다 논바닥 같은 금이 갔고
손톱 밑에는 늘 검은 삶의 때가 스며 있었다
그래도 어머니는 아이들 밥숟가락 앞에서 한 번도 먼저 우신 적이 없었다
밤이면 호롱불 밑에서 남의 집 품팔이해 얻어온 헌 옷을 뜯어 우리 양말을 기우셨다
작디작은 바늘귀에 실을 꿰며 어머니는 찢어진 천만 꿰맨 것이 아니었다
가난으로 터진 삶의 구멍과 자식들 허기진 내일까지 한 땀 한 땀 꿰매고 계셨다
그때는 몰랐다 왜 어머니가 그리 오래 반짇고리 앞에 앉아 계셨는지 왜 실 한 토막도 버리지 못하고 왜 해진 양말을 몇 번씩 뒤집어 또 기우셨는지
이제 와 생각하면 어머니의 반짇고리는 살림도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한 여인의 생애였고 눈물의 밥그릇이었으며 가난한 가족을 끝내 지켜낸 작은 우주였다
쉰아홉 너무 이른 나이에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셨다
장례를 치르던 날 방 한구석에 덩그러니 놓인 반짇고리를 보며 나는 끝내 울음을 삼키지 못했다
실패는 더는 돌지 않았고 가새도 입을 다문 채 가만히 누워 있었다
마치 평생 참고 살아온 어머니처럼 사십 년이 흘렀다
세상은 많이 변했고 나는 어느새 어머니 나이를 훌쩍 지나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비 오는 날이나 늦은 밤 불 꺼진 방 안에서는 아직도 그 반짇고리 뚜껑 여는 소리가 들린다
달그락 그 소리 따라가면 호롱불 아래 굽은 허리로 양말을 기우시던 어머니가 금방이라도 고개 들어
“얘야, 춥지 않냐”
물으실 것만 같다
어머니는 가셨지만 혼은 아직 그 반짇고리 안에 남아 있다
색 바랜 실패 속에 닳아버린 골무 속에 눈물 먹은 바늘 끝에
끝끝내 자식들 삶만은 해지지 않게 붙들어주시던 그 사랑 속에.
ㅡ 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