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

할머니의 비녀 ㅡ청람 김왕식

할머니의 비녀 2026.05.17
할머니의 비녀

ㅡ청람 김왕식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할머니의 비녀

청람 김왕식

사람의 일생은 무엇으로 남을까. 어떤 이는 이름으로 남고, 어떤 이는 사진 한 장으로 남는다. 그러나 오래 가난했던 사람들은 대개 물건 하나를 남긴다. 평생 몸 가까이 두고 닳도록 만졌던 것들. 그것은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한 생애의 체온이 스며든 또 하나의 육신이다.

내게 할머니는 비녀로 남아 있다.

장롱 깊숙한 곳, 빛바랜 명주 수건 속에는 오래된 은비녀 하나가 잠들어 있었다. 검은 세월을 오래 건너온 탓인지 은빛은 이미 흐려져 있었고, 끝 한쪽은 조금 휘어 있었다. 어린 날의 나는 그것을 그저 낡은 장신구쯤으로 여겼다. 세월이 흐른 뒤에야 알았다. 그 작은 비녀 하나가 한 여인의 일생을 꿰뚫고 있었다는 것을.

할머니는 1895년, 갑오개혁 이듬해 충청도 보령 땅에서 태어났다. 나라가 흔들리던 시대였다. 조선의 긴 그림자가 기울고, 세상은 새로운 이름으로 갈아입고 있었으나 백성들의 삶은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았다. 그해 바닷바람 거칠던 시골마을에서 한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이름은 덕녀. 덕스럽게 살아가라는 뜻이었다.

시대는 어린 이름 하나도 가만히 품어주지 않았다.

아홉 살. 할머니는 비녀 하나 꽂고 시집을 갔다.

지금 생각하면 그 나이는 아직 꽃잎보다 여린 시간이다. 친구들과 냇가에서 물장구치며 놀아야 할 아이가 작은 손으로 혼례 치맛자락을 움켜쥔 채 낯선 집 대문을 넘어야 했다. 머리도 제대로 틀 줄 모르던 아이에게 사람들은 비녀를 꽂아주었다. 그 순간부터 소녀는 아이가 아니었다. 누군가의 며느리였고, 누군가의 아내였다.

열두 살 난 지아비를 섬겼다.

새벽이면 우물가로 가 물을 길었고, 겨울이면 아궁이 앞에서 손등이 터지도록 불을 지폈다. 아이의 손은 어른보다 먼저 늙어갔다. 세상은 어린 여자아이의 등을 다정히 쓰다듬기보다 먼저 짐을 올려놓는 법을 알고 있었다.

지금 와 생각하면, 할머니가 가장 오래 견딘 것은 가난보다 시대였는지도 모른다.

나라를 잃은 백성들의 눈빛은 늘 겨울 들판 같았다. 왜놈들의 군홧발이 골목을 지나가고, 젊은 사내들이 징용으로 끌려가던 시절.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울음조차 삼켜야 했다. 할머니는 글 한 줄 배우지 못했지만 시대의 슬픔은 몸으로 먼저 읽어냈다.

보리쌀 몇 줌으로 겨울을 건너고, 굶주린 아이들을 재우며 긴 밤을 넘겼다. 그러면서도 할머니는 머리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새벽이면 찬물에 머리를 빗어 단정히 틀고 늘 그 비녀를 꽂았다.

나는 오래도록 그것이 궁금했다.

왜 그렇게 낡은 비녀 하나를 평생 버리지 못했을까.

이제야 조금 알 것도 같다. 그 비녀는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무너지는 세월 속에서도 끝내 자신을 잃지 않으려는 한 여인의 마지막 품위였다. 가난은 사람의 밥상을 먼저 빼앗고, 시대는 사람의 이름을 흔들지만, 비녀를 꽂는 순간만큼은 스스로를 지키고 싶었던 것이다.

할머니는 평생 큰소리로 자신의 삶을 말하지 않았다. 여자들의 생애가 대개 그렇듯, 울음은 부엌에서 삭고 한숨은 새벽에 식었다. 그러나 침묵 속에서도 사람은 자신의 생을 남긴다. 할머니는 비녀로 자신의 시간을 남겨두었다.

나는 가끔 그 비녀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오래 바라본다.

차갑다.

이상하게도 오래 쥐고 있으면 체온이 옮겨온다. 마치 한 세기 전 어린 신부였던 할머니의 손끝이 아직 거기 남아 있는 것 같다. 바닷바람 불던 보령 들녘과, 검은 밤 호롱불 아래 굽은 허리로 앉아 있던 조선 여인의 그림자까지 함께 만져지는 듯하다.

세상은 너무 빨라졌다. 사람들은 낡은 것을 쉽게 버리고, 오래 견디는 삶을 촌스럽다고 말한다. 인간의 품위는 화려함이 아니라 견딤에서 나온다는 것을 나는 할머니의 비녀를 통해 배웠다.

그 작은 은비녀 하나에는 한 여인의 눈물과 조선의 가난, 식민의 어둠, 그리고 끝내 삶을 놓지 않았던 한국 어머니들의 강인한 침묵이 박혀 있다.

어쩌면 역사는 거대한 궁궐이나 전쟁 기록 속에만 남는 것이 아니다.

어떤 시대는 작은 비녀 하나 속에서 더 오래 운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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