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진성 시인의 「세한도」를 읽으며 ㅡ 청람 김왕식
배진성 시인의 「세한도」를 읽으며 2026.05.19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세한도
시인 배진성
심장내과 복도에는 어둠이 쌓여 있다
나의 하느님이신 원장님께서 문을 열고 불을 켠다
잠시 후에 천사들이 들어오며 출근 체크를 한다
피를 뽑아 검사하는 동안 나는 세한도를 본다
늙은 한 그루는 소나무가 분명한데
젊은 세 그루는 소나무일까 잣나무일까
나무들보다 둥그런 문이 더 궁금하다
보름달 안에서 반달이 보인다
초승달과 그믐달도 보인다
그 문에서 나의 반월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대동맥판막 반월문에서 시계소리가 들린다
반월산에 나란히 누워계신 반달 두 개도 보인다
엎어놓은 반달의 잔디 위에도 눈이 쌓여 있으리라
아직은 나의 반달문이 잘 열리고 잘 닫히고 있으리라
금속으로 만든 반월 문짝이 빠지는 일도 있으리라
문짝이 칼이 되어 대동맥을 갈라버릴 수도 있으리라
문을 지나가는 피가 떡이 되어 핏줄을 막아버릴 수도 있으리라
혈전이 뇌로 가서 뇌졸중을 일으킬 수도 있으리라
비트코인처럼 빛나던 문이 악귀의 입처럼 변할 수도 있으리라
아, 나는 이제 심장에서 나가는 문이 가장 무섭다
아, 나는 이제 세상으로 나가는 달이 가장 무섭다
나는 나의 하느님에게 십계명을 받아 들고 나온다
세한도 밖으로 폭설은 멈출 줄 모르는데
늙은 소나무 한 그루 아직은 잘 살아가고 있다
장무상망(長毋相忘), 나의 묽은 피로 붉은 낙관을 찍는다
■
심장은 마지막 문을 닫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 배진성의 「세한도」를 읽으며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병원은 참으로 이상한 곳이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존재하지만, 정작 그 안에 오래 머물다 보면 인간은 자꾸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 하얀 형광등 아래를 걷는 순간부터 사람은 자기 몸 안의 어둠을 처음 만난다. 배진성 시인의 「세한도」는 바로 그 어둠의 복도에서 시작된다. 이 시는 단순히 병을 앓는 사람의 불안을 묘사하지 않는다. 외려 한 인간이 자기 심장 속 ‘문’을 바라보며 존재의 끝과 시작을 동시에 응시하는 시다.
첫 행부터 압도적이다. “심장내과 복도에는 어둠이 쌓여 있다.” 보통 어둠은 내려오거나 드리워진다. 이 시에서 어둠은 ‘쌓여’ 있다. 마치 눈처럼, 먼지처럼, 세월처럼 켜켜이 쌓여 있다. 병원 복도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인간의 두려움이 퇴적된 장소가 되는 순간이다.
배진성 시인은 그 무거운 공간에 뜻밖의 존재를 등장시킨다. “나의 하느님이신 원장님.” 의사를 하느님이라 부르는 이 장면에는 절박함과 해학이 동시에 스며 있다. 인간은 건강할 때는 자기 몸을 믿지만, 병이 깊어지면 결국 타인의 손에 생명을 맡기게 된다. 그 순간 의사는 단순한 의료인이 아니라 생사의 문턱을 지키는 사제가 된다. 배진성 시인은 그 불안한 인간 심리를 아주 능청스럽게, 그러나 처절하게 드러낸다.
이 시가 놀라운 이유는 심장내과와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겹쳐놓는 발상 때문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병원에서 검사 결과를 걱정할 텐데, 시인은 갑자기 세한도를 본다. 늙은 소나무 한 그루와 젊은 나무 몇 그루를 바라보며 그는 나무보다 “둥그런 문”을 더 궁금해한다. 이 순간 시는 단순한 병상 체험기를 넘어 존재론적 상징의 세계로 이동한다.
특히 ‘반월문’의 이미지는 압권이다. 심장의 대동맥판막을 달의 형상과 연결시키는 상상력은 참으로 기이하고 아름답다. 보름달, 반달, 초승달, 그믐달… 달의 변화가 곧 심장의 개폐 운동처럼 읽힌다. 인간의 생명도 결국 하나의 문짝 운동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시인은 서늘하게 보여준다.
이 시의 진짜 힘은 중반 이후부터 시작된다. “금속으로 만든 반월 문짝이 빠지는 일도 있으리라 / 문짝이 칼이 되어 대동맥을 갈라버릴 수도 있으리라.” 여기서 독자는 갑자기 숨이 턱 막힌다. 지금까지 시를 지탱하던 은유와 철학이 순식간에 육체의 공포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심장은 더 이상 낭만적 상징이 아니다. 생과 사를 가르는 실제의 문이다.
시인은 이 공포를 끝까지 밀고 간다. 혈전이 뇌로 가고, 핏줄이 막히고, 심장의 문이 악귀의 입처럼 변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심지어 “비트코인처럼 빛나던 문”이라는 표현까지 등장한다. 얼마나 현대적인가. 인간은 이제 심장조차 자본의 언어로 이해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빛나던 것이 하루아침에 폭락하듯, 생명 또한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는 불안이 이 한 줄 속에 숨어 있다. 시는 끝내 절망으로 무너지지 않는다.
시인은 마지막에 다시 ‘세한도’의 늙은 소나무를 바라본다. 폭설 속에서도 아직 살아 있는 나무 한 그루. 이것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다. 인간 존재의 마지막 자존이다. 몸은 쇠약해지고 심장은 흔들리지만, 그럼에도 살아 있으려는 의지 하나가 눈 속 소나무처럼 남아 있다.
마지막 행. “장무상망(長毋相忘), 나의 묽은 피로 붉은 낙관을 찍는다.” 이 장면은 거의 전율에 가깝다. 추사가 세한도에 남긴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는 말이, 여기서는 생명과 인간 사이의 마지막 약속으로 변한다. 시인은 더 이상 먹으로 낙관을 찍지 않는다. 자기 피로 찍는다. 그것도 ‘묽은 피’로. 얼마나 처연하고 얼마나 아름다운가.
배진성 시인의 시를 읽다 보면 자주 놀라게 된다. 그는 병원 복도 하나에서도 철학을 발견하고, 심장 판막 하나에서도 우주를 본다. 그의 시는 단순히 생각이 깊은 것이 아니다. 삶과 죽음 사이를 오래 걸어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사유의 밀도를 지니고 있다.
하여, 그의 시는 읽는 것이 아니라 통과하는 경험에 가깝다. 독자는 어느새 자기 심장 속 문 하나를 가만히 만져보게 된다. 아직 잘 열리고 있는지, 아직 세상을 향해 천천히 닫히고 있는지.
ㅡ청람
댓글
로그인 없이 바로 남길 수 있습니다. 나중에 본인이 수정·삭제하려면 이 댓글의 비밀번호를 정해 주세요. 서로 예의를 지켜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