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

문장은 급기야 사람의 체온을 닮아간다 ㅡ청람

문장은 급기야 사람의 체온을 닮아간다 ㅡ청람 2026.05.25
문장은 급기야 사람의 체온을 닮아간다 ㅡ청람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순전히 개인적 견해임을 밝힌다.

살짝 미소 지으며 읽히기를 바라는 마음 크다.

작가론 ― 문장은 급기야 사람의 체온을 닮아간다

문학판을 몇 해 기웃거리다 보니 이상한 확신 하나가 생겼다.

작가란 하늘에서 따로 내려오는 종족이 아니라는 것이다.

누구든 조금 더 오래 생각하고, 조금 더 깊이 아파하고, 조금 더 끝까지 바라보면 슬그머니

작가 쪽으로 걸어 들어가게 된다.

다만 그 사유의 병이 어디까지 번졌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시인을 보면

먼저 말수가 짧다. 짧은 정도가 아니다.

마치

언어를 다이어트시키다가 끝내

자기 심장까지 깎아내린 사람들 같다.

시어 하나 붙들고 밤새 뒤집고 닦고 문지른다. 쉼표 하나에도 숨소리를 재고, 행갈이 하나에도 영혼의 체중을 단다. 그러니

시인이 평소 말을 많이 하면 외려 이상하다.

그들은 대개 하고 싶은 말을 이미 시 속에서 다 삼켜버린 사람들이다.

어느 날 술 한잔 들어가거나 마음속 둑이 무너지면 큰일 난다.

그동안 눌러 담았던 말들이 화산처럼 터진다. 한 줄 쓰기 위해 백 줄을 죽여온 사람들 아닌가. 억눌린 언어의 원혼들이 그제야 밖으로 뛰쳐나오는 것이다.

반면 소설가는 다르다.

그들은 늘 말을 늘리는 쪽으로 생애를 허비한다. 인물 하나 살리려고 골목을 만들고, 골목 하나 설명하려고 비 오는 냄새까지 데려온다.

그러니

소설 한 권 쓰고 나면 사람이 반쯤 말라 있다.

등장인물 밥 먹이고, 울리고, 죽이고, 살리느라 작가 자신이 먼저 기진맥진한다.

그래서인지 정작 현실에서는 말을 길게 잘 안 한다. 대개

묻는 말에만 대답한다.

“식사는 하셨어요?” “예.”

끝이다.

이미 머릿속에서 삼대에 걸친 가족사가 지나갔기 때문이다.

가끔은 소설가와 밥 먹다가 침묵만 씹고 오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 침묵 속에서는 누군가 불륜 중이고, 누군가는 가출했고, 누군가는 새벽역에서 울고 있다.

수필가는 좀 다르다. 솔직히 말하면 문단에서 제일 눈치 빠른 사람들이 수필가다.

시인 앞에서는 괜히 문장을 짧게 줄이며 “여백이 중요하지요”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소설가 앞에서는 갑자기 인생사를 길게 푼다.

그러다 어느 날은 서너 페이지 써놓고 “장편掌篇의 호흡”이라 하고, 원고지 서너 장 써놓고 “짧은 서사”라 부른다.

참 신기한 재주다. 하지만 밉지 않다.

수필가는 안다. 인생이 꼭 거창한 철학으로만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국그릇 가장자리의 금 하나, 낡은 슬리퍼 한 짝, 시장통 오뎅 국물 같은 데에도 사람 사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하여, 수필가는 대체로 세상과 오래 싸우지 않는다.

적당히 웃고, 적당히 물러나고, 적당히 아픈 척하면서도 결국 끝까지 사람 곁을 지킨다.

어쩌면 문학 중 가장 오래 살아남는 장르는 수필인지도 모른다.

시는 번개처럼 오고, 소설은 강물처럼 흐르지만, 수필은 저녁 밥상처럼 남는다.

작가란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 남들은 지나친 것을 조금 오래 바라본 사람,

남들은 잊어버린 슬픔을 혼자 끝내 기억해 낸 사람,

그리고 세상이 점점 빨라질수록 혼자만 천천히 인간 쪽으로 걸어간 사람이다.

해서,

좋은 문장은 기술이 아니라 사람의 체온에서 나온다.

오래 바라보니 문학은 머리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끝내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에 더 가까웠다.

ㅡ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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