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 되지 못한 왕 ㅡ청람 김왕식
왕이 되지 못한 왕 2026.05.29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왕이 되지 못한 왕
조선의 새벽은 가끔 해가 뜨기 전에 먼저 한 사람의 이름으로 밝아오곤 했다
창덕궁 담장 너머 동녘이 붉어질 무렵이면 아직 피지 못한 해 하나가 처마 끝에 걸려 있었다
효명
그 이름은 아침보다 먼저 태어난 빛이었다
겨울 강물은 얼기 직전 가장 깊은 소리를 낸다
세도의 그림자가 궁궐 마루까지 길게 드리우던 날들 비단옷자락 아래서는 백성들의 한숨이 마른 나뭇잎처럼 부서지고 있었다
궁궐은 높았으나 사람들의 삶은 낮았다
소년의 손에는 왕홀보다 먼저 나라의 체온이 쥐어졌다
밤마다 등잔불은 새벽의 눈꺼풀을 붙들었고 먹빛은 마르지 못한 채
또 하루의 근심을 적어 내려갔다 봄은 꽃으로만 오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한 자락 춤으로 오고 한 줄기 피리 소리로 오고 사람의 마음을 다독이는 부드러운 숨결로 오기도 한다
효명의 궁궐에는 음악이 꽃처럼 피어났다
춤사위마다 바람이 머물고 가락마다 강물이 흘렀다
쇠붙이보다 단단한 것이 사람의 품격임을 보여주려는 듯 창덕궁 후원에는 나무보다 오래된 적막이 있었다
그 적막 속을 걷는 사람 하나 바위는 등을 내어주고 바람은 길을 비켜주고 햇살은 조용히 어깨에 내려앉았다
세상 모든 것이 잠시 숨을 고르는 순간 같았다
너무 일찍 핀 매화는 봄을 끝까지 보지 못하는 법
스물둘
꽃봉오리의 나이 강물은 아직 바다에 닿지 못했고 새벽은 아직 낮이 되지 못했는데 하늘이 먼저 불러갔다
그날 이후 창덕궁의 나무들은 한동안 잎을 흔들지 못했고 연못의 물결도 낮은 목소리로만 움직였다
피리 소리는 허공에 남고 춤사위는 바람 속으로 스며들었다 왕관은 끝내 그의 이마에 오르지 못했다
왕좌란 본래 높은 곳에 놓인 의자가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속에 세워지는 것
백성의 눈물 곁에 머물던 그림자 무너지는 품격을 붙들던 손길 조용히 세월을 밝히던 한 줄기 등불
지금도 늦가을 창덕궁 후원을 걷다 보면 낙엽 한 장 바람에 뒤집히는 소리가 들린다
마치 끝내 왕이 되지 못한 한 사람이 천천히 책장을 넘기는 소리 같다
아침은 오지 못했으나 새벽은 남았다 조선은 그를 효명이라 부른다
해가 되지 못한 태양, 오래도록 지지 않는 동쪽 하늘의 붉은 여명으로
ㅡ청람
댓글
로그인 없이 바로 남길 수 있습니다. 나중에 본인이 수정·삭제하려면 이 댓글의 비밀번호를 정해 주세요. 서로 예의를 지켜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