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

오늘이라는 꽃 한 송이 ㅡ청람 김왕식

오늘이라는 꽃 한 송이 2026.05.30
오늘이라는 꽃 한 송이

ㅡ청람 김왕식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오늘이라는 꽃 한 송이

아침은 늘 안온히 찾아온다. 산맥을 넘는 것도 아니고, 북소리를 울리는 것도 아니다. 밤새 창문턱에 내려앉아 있던 어둠을 살며시 밀어내며, 햇살 한 조각을 방 안으로 들여보낼 뿐이다. 세상은 그렇게 매일 새로 시작된다. 나이가 들수록 아침은 단순한 시작이 아니다. 하루라는 이름의 선물을 다시 받아 드는 일이다.

어느 봄날이다. 골목 끝에서 지팡이를 짚은 노인을 만났다. 그의 걸음은 느렸다. 바람이 한 번 지나가는 동안 겨우 한 걸음을 내딛을 만큼 느렸다. 그러나 그 걸음에는 이상한 빛이 있었다. 꽃이 피는 속도도 그쯤일 것이다. 강물이 바다를 향해 흐르는 속도도 어쩌면 그쯤일 것이다. 세상은 빠름을 찬양하지만, 자연은 한 번도 서두른 적이 없다. 매화는 제 때가 오면 피고, 감나무는 제 계절이 되면 잎을 떨군다. 누구와 경쟁하지도 않고, 누구를 앞서려 하지도 않는다. 노인의 걸음도 그러했다. 지팡이는 그의 부족함이 아니라 긴 세월이 남긴 나이테 같았다. 수많은 여름의 땡볕을 건너고, 겨울의 눈보라를 통과하며 쌓인 시간의 결이 나무 둥치에 새겨지듯, 그의 손에 쥔 지팡이에도 생애의 무늬가 배어 있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 걸음마다 하루가 열리고 있었다. 값비싼 자동차는 거리를 줄여주지만, 사람의 생애를 대신 살아주지는 못한다. 제 발로 하루를 건너는 일. 그보다 장엄한 여행은 드물다. 세월은 사람의 얼굴에도 흔적을 남긴다.

언젠가 시골집 부엌에서 어머니가 저녁상을 차리는 모습을 바라본 적이 있다. 손등에는 실핏줄이 푸른 강처럼 떠올라 있었고, 손마디는 오래된 뿌리처럼 굽어 있었다. 젊은 날의 매끄러움은 이미 먼 계절로 흘러갔다. 그러나 그 손이 무를 썰고 국을 끓이며 밥상을 차려낼 때면 부엌에는 작은 기적이 피어났다. 쌀 한 줌이 밥이 되고, 물 한 바가지가 국이 되고, 소박한 채소 몇 잎이 저녁의 위로가 되는 일. 그 풍경은 마치 겨울 끝자락의 매화 같았다. 화려하지 않지만 가장 깊은 향기를 품고 있었다. 세상은 큰일을 위대하다고 말한다.

높은 자리에 오르는 일. 많은 돈을 모으는 일. 남들보다 앞서는 일.

생애의 저녁 무렵에 가까워질수록 다른 풍경들이 눈에 오래 머문다. 누군가 차려준 따뜻한 밥 한 끼. 무사히 돌아온 가족의 발자국 소리. 창가에 앉아 마시는 차 한 잔. 오늘이라는 하루. 그것들은 시장에서 살 수도 없고, 권력으로 얻을 수도 없는 것들이다. 하늘은 가장 귀한 선물들을 늘 평범한 포장지에 싸서 보내는 법이다.

사람들은 자주 지나친다. 너무 가까이 있어서. 너무 흔해서. 너무 익숙해서. 산책길에 핀 들꽃이 그렇고, 창가에 드는 햇살이 그렇고, 함께 밥을 먹는 사람이 그렇다. 세월은 모든 것의 값을 다시 매긴다. 젊은 날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늦은 저녁의 빛 속에서는 황금보다 귀하게 빛난다.

오늘도 누군가는 병실 창문 너머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다시 걷기를 소망하며 재활치료실 문을 열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떠난 사람의 이름을 가슴속에 품은 채 하루를 견디고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오늘은 달력 위의 숫자가 아니다. 간절히 받아 든 한 송이 꽃이다. 치유와 회복은 거창한 선언 속에서 찾아오는 경우보다 작은 일상 속에서 스며드는 경우가 많다.

마른땅이 봄비를 머금듯, 얼어붙은 강이 서서히 풀리듯, 상처 입은 마음에도 어느 날 햇살 한 조각이 내려앉는다. 신의 은총도 그러하다. 폭포처럼 쏟아질 때도 있지만, 대개는 새벽이슬처럼 조용히 스며든다. 말라가던 마음의 뿌리 곁에 물이 고이고, 굳게 닫혀 있던 창문 틈으로 바람이 드나들며, 오래 잊고 있던 미소 한 줄기가 입가에 피어난다.

오늘이라는 하루도 그런 선물 가운데 하나일지 모른다. 지팡이에 몸을 기대고 있을지라도 자신의 발로 길을 건너는 사람. 주름진 손으로 사랑의 밥상을 차리는 사람.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서 묵묵히 하루를 살려내는 사람. 그들의 생애는 거대한 불꽃보다 오래 남는 등불에 가깝다. 세상을 밝히려 애쓰지 않아도 주변을 따뜻하게 데우는 불빛. 저녁이 오면 창문마다 하나씩 켜지는 불빛처럼.

오늘도 하늘은 우리에게 하루를 건네주었다. 아직 걷고 있는 발이 있고, 아직 사랑을 담을 손이 있고, 아직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이 남아 있다. 그것만으로도 삶은 이미 한 송이 꽃을 피워 올리고 있다.

소리 없이, 누구보다 눈부시게.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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