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

수필은 무엇으로 빛나는가 ㅡ청람 김왕식

수필은 무엇으로 빛나는가 2026.05.31
수필은 무엇으로 빛나는가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수필은 무엇으로 빛나는가 ― 질서를 깨뜨린 한 장의 연잎처럼

청람 김왕식

가끔 수필을 가볍게 말하는 사람을 만난다. 어떤 이는 수필을 두고 잡문이라고 한다.

허 ㅡ 참.

수필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인지, 아니면 수필의 향기를 아직 맡아보지 못한 사람인지 알 수 없다.

문학의 세계에서 수필은 시나 소설의 곁가지가 아니다. 외려 인간의 체온과 삶의 결이 가장 진하게 배어 있는 장르다. 시가 언어의 정수라면 수필은 삶의 정수다. 소설이 상상력의 건축물이라면 수필은 한 인간이 살아온 시간의 나이테다.

수필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피천득 선생이다. 그는 수필의 아름다움을 설명하며 아주 인상적인 비유를 남겼다.

“청자연적에 나란히 새겨진 연잎 가운데 하나가 비뚤어져 나온 것.”

파격의 미! 참으로 절묘한 표현이다.

도자기 위에 새겨진 연잎들이 모두 같은 방향으로 가지런히 놓여 있다면 그것은 아름답기는 하겠지만 어딘가 숨이 막힌다. 그런데 그 가운데 연잎 하나가 살짝 방향을 틀고 있다. 질서를 깨뜨리고 있다. 규칙을 벗어나고 있다.

바로 그 순간 정적인 아름다움은 살아 있는 아름다움으로 바뀐다. 수필의 미학이 거기에 있다. 수필은 완벽한 대칭을 추구하지 않는다. 정답을 향해 달려가지도 않는다. 논문처럼 증명하려 하지도 않고, 철학서처럼 체계를 세우려 하지도 않는다.

외려 삶의 한쪽으로 비켜 선 생각, 우연히 스쳐 간 기억, 문득 가슴에 내려앉은 그리움, 설명되지 않는 슬픔과 기쁨을 담는다. 하여, 수필은 파격의 문학이다. 그 파격은 소란스럽지 않다. 질서를 파괴하기 위해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살짝 비껴서는 것이다.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한 줄기처럼. 마치 대칭을 거부한 꽃잎 하나처럼. 마치 악보에는 없는 쉼표 하나처럼.

수필의 아름다움은 바로 그런 자연스러운 어긋남에서 태어난다. 어떤 이는 수필을 찻물에 비유한다. 좋은 차는 처음부터 향기를 강요하지 않는다. 은은하게 번지고, 조용히 스며들고, 시간이 흐를수록 깊어진다.

수필 또한 그렇다. 읽는 순간보다 읽고 난 뒤가 더 길다. 책장을 덮은 후에도 한 문장이 따라오고, 오래전 읽은 문장이 문득 새벽길에서 떠오르기도 한다. 수필은 속도가 아니라 숙성의 문학이다. 수필을 생각할 때마다 어린 시절 겨울밤이 떠오른다. 매서운 바람이 들창문을 흔들던 밤이었다. 창호지 틈으로 스며드는 찬바람 소리가 방 안을 맴돌았다. 그 소리 너머로 들려오던 어머니의 다듬이질. 한밤중 적막을 건너오던 그 소리.

그것은 단순히 옷감을 다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가난한 살림을 펴는 소리였고, 가족의 내일을 다독이는 소리였으며, 자식들을 향한 사랑이 천 위에 스며드는 소리였다.

더 아름다운 것은 다듬이질이 끝난 뒤였다. 소리는 멈췄는데도 여운은 남아 있었다. 방 안의 공기 속에. 잠든 아이들의 꿈속에. 어머니의 한숨 속에.

수필도 그렇다. 좋은 수필은 끝났는데 끝나지 않는다. 마지막 문장을 읽었는데도 마음속에서는 계속 이어진다. 그 여백 때문이다. 수필은 문학 가운데 가장 여백이 많은 장르다. 말하지 않은 것이 말한 것보다 많고, 설명한 것보다 남겨둔 것이 더 깊다.

수필은 독자를 믿는다. 독자가 빈칸을 채우고, 독자가 침묵을 듣고, 독자가 여운을 완성하기를 기다린다. 수필은 사람의 문학이다. 사람이 없으면 수필도 없다. 삶이 없으면 수필도 없다. 눈물 한 방울 없이 쓰인 수필은 살아남기 어렵고, 진실한 체온이 없는 수필은 독자의 마음에 오래 머물지 못한다.

수필은 한 인간이 세상과 나눈 가장 조용한 대화다. 그 대화가 깊어질수록 문장은 화려해지기보다 맑아진다. 해서 수필은 청자연적의 비뚤어진 연잎과 닮았다. 정해진 질서 속에서 홀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연잎 하나. 그 작은 어긋남이 오히려 전체를 살아 있게 하듯, 수필은 인생이라는 거대한 질서 속에서 문득 고개를 돌린 한 사람의 진솔한 시선으로 완성된다.

그 시선이 오래 남는다. 찻물의 향기처럼. 겨울밤 다듬이 소리처럼. 들창문을 스치는 바람처럼. 그리고 무엇보다, 한 사람의 삶이 남긴 따뜻한 체온처럼.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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