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

사람이라는 거울 앞에서 ㅡ청람 김왕식

사람이라는 거울 앞에서 ㅡ청람 김왕식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사람이라는 거울 앞에서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세상을 오래 바라볼수록 사람은 산보다 어렵고 바다보다 깊다. 산은 오르면 높이를 알 수 있고, 바다는 건너면 넓이를 짐작할 수 있다.

사람은 다르다. 평생 곁에 있어도 끝내 다 읽지 못하는 책 한 권 같다. 겉표지는 웃고 있는데 속장은 울고 있고, 따뜻한 말을 건네면서도 주머니 속에는 차가운 계산기를 품고 있는 경우도 있다.

사람의 얼굴에는 주름이 생기지만, 마음에는 가면이 생긴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을 만나는 일이 즐거움인 동시에 공부가 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살다 보면 유난히 조용한 사람이 있다. 말보다 귀가 먼저 움직이는 사람. 남의 장점뿐 아니라 약점까지 기억하는 사람. 그 사람 앞에서는 웃고 있어도 어딘가 옷깃을 여미게 된다. 화살은 보이는 곳에서 날아오는 법이 드물다.

대개는 기억 속에서 날아온다. 세상에서 가장 날카로운 칼은 쇠로 만든 칼이 아니라 상대의 약점을 훤히 알고 있는 마음속 칼이다. 사람을 가까이 둘 때 필요한 것은 친밀함보다 품성이다.

두 개의 심장을 가진 사람도 있다. 한 개는 입 안에 있고, 한 개는 가슴속에 있다. 입 안의 심장은 사랑을 말한다. 가슴속 심장은 셈을 한다. 필요한 날에는 꽃을 들고 오고, 필요가 끝난 날에는 바람처럼 사라진다. 인간관계가 무너지는 소리는 크지 않다. 문 닫히는 소리보다 작고, 낙엽 떨어지는 소리보다도 작다. 다만 마음속 우물이 조금씩 마른다.

진짜 친구는 손뼉 치는 사람이 아니다. 멈춰 세우는 사람이다. 벼랑 끝에서 등을 떠미는 손보다, 팔을 붙드는 손이 귀하다. 칭찬만 지나치게 건네는 사람 곁에서는 꽃은 필 수 있어도 열매는 맺기 어렵다. 나무는 햇빛만으로 자라지 않는다. 비바람도 필요하다.

쓴소리 없는 우정은 거울 없는 방과 비슷하다. 얼굴에 묻은 흙조차 보이지 않는다. 세월이 가르쳐주는 교훈 가운데 하나는 이것이다.

실수는 죄가 아니다. 같은 실수를 사랑하는 마음이 문제다. 길을 잃을 수는 있다. 같은 웅덩이에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일은 다른 이야기다. 넘어진 자리마다 발자국이 남는다. 그 발자국을 읽지 못하는 삶은 같은 비를 맞고 같은 돌에 걸린다.

욕심이라는 짐도 있다. 참 이상한 짐이다. 채울수록 가벼워지지 않는다. 한 채의 집이 두 채를 부르고, 두 채의 집이 세 채를 부른다.

창고는 넓어지는데 가슴은 좁아진다. 배는 부른데 눈은 굶주린다. 많이 가진 사람보다 충분함을 아는 사람이 부자라는 말은 괜히 생긴 문장이 아니다. 행복은 소유의 숫자가 아니라 만족의 온도에서 자란다.

권력도 그렇다. 의자는 앉으라고 만든 물건이다. 많은 사람은 의자를 집으로 착각한다. 내려와야 할 시간을 잊는다. 떠나야 할 계절을 잊는다.

강물은 흘러야 맑고, 권력은 내려놓을 때 아름답다. 한때의 박수를 영원으로 오해하는 순간부터 비극은 시작된다. 사람을 가장 가난하게 만드는 병은 통장에 있는 병이 아니다. 마음에 있는 병이다. 불안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집이 커도 따라오고, 지위가 높아도 따라온다. 밖에서 길을 잃은 사람은 집을 찾으면 된다. 마음에서 길을 잃은 사람은 밤이 길다. 잠이 찾아오지 않고, 새벽이 와도 아침이 오지 않는다.

인간의 품격은 낯선 사람을 대하는 태도보다 약한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난다. 강한 사람 앞에서 고개 숙이는 일은 어렵지 않다. 약한 사람 앞에서 무릎을 낮추는 일이 어렵다. 진짜 힘은 올라서는 데 있지 않다. 품어주는 데 있다.

세상에는 많은 도둑이 있다. 금고를 털고 지갑을 훔치는 도둑도 있다. 더 무서운 도둑은 시간을 훔치는 사람이다. 해야 할 일을 내일로 미루게 만들고, 꿈을 다음 달로 미루게 만들고, 인생을 언젠가로 미루게 만든다.

시간은 잃어버린 물건처럼 찾을 수 없다. 강물처럼 흘러간다. 잡으려는 손가락 사이로도 빠져나간다. 끝내 남는 것은 사람이다.

얼마나 가졌는가보다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 얼마나 높이 올랐는가보다 얼마나 따뜻했는가. 얼마나 유명했는가보다 얼마나 진실했는가.

인생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 통장은 따라오지 않는다. 명함도 따라오지 않는다. 남는 것은 단 하나.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그 사람 참 사람다웠다”

짧고 따뜻한 한 문장뿐이다.

ㅡ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