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슴꽃이 피는 계절 ㅡ청람 김왕식
머슴꽃이 피는 계절 2026.06.03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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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슴꽃이 피는 계절
유월이 오면 나라 전체가 거대한 들판이 된다
들판에는 4년마다 같은 꽃이 핀다 이름하여 머슴꽃
평소에는 보이지 않는다 바람이 불어도 안 피고, 비가 와도 안 피고, 봄이 와도 안 핀다
표가 익기 시작할 무렵이면 어디선가 일제히 꽃망울을 터뜨린다
참 신기한 꽃이다 허리에서 핀다 어제까지만 해도 하늘을 향해 곧게 서 있던 줄기가 갑자기 보리 이삭처럼 숙여진다
사람들은 그 꽃을 보며 감탄한다 참 겸손하구나 참 낮구나 참 사람 냄새가 나는구나
꽃은 웃는다 꽃은 원래 웃는 법을 잘 안다
유월의 거리는 꽃밭이 된다 시장에도 피고 경로당에도 피고 교회 마당에도 피고 아파트 엘리베이터 앞에도 핀다
한 송이는 종이 되겠다고 말하고 한 송이는 머슴이 되겠다고 말하고 한 송이는 국민의 신발이 되겠다고 말한다
듣고 있노라면 대한민국은 머슴 부족 국가처럼 보인다 도대체 누가 주인인지 알 수 없을 정도다
그 꽃들은 시멘트 바닥에도 얼굴을 묻는다 이마가 닿을 만큼 낮아진다
나는 그 풍경을 바라보며 오래전 겨울 강 하나를 떠올린다 얼어붙은 강물 위에서 한 나라의 자존심이 무릎을 꿇던 날 역사는 지나가도 자세는 살아남는다
밤이 온다 개표 방송이 시작된다 투표함은 말이 없다 묵직한 입으로 종이들을 씹어 삼킨다 마치 오래된 우물이 사람들의 욕망을 한 장씩 받아먹는 것 같다
그리고 새벽 당선 두 글자가 떠오른다
그 순간 머슴꽃은 진다 꽃잎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겸손이라는 꽃잎 친절이라는 꽃잎 미소라는 꽃잎 낮아짐이라는 꽃잎
한밤 사이에 우수수 떨어진다 그 자리에 다른 식물이 자란다
벼슬나무
참 빠르게 자란다 뿌리는 어제 심었는데 아침이면 하늘을 찌른다
어제까지는 골목으로 걸어 다녔는데 오늘은 사람들 머리 위를 걷는다
어제까지는 두 손으로 악수했는데 오늘은 손끝으로 계절을 건드린다
어제까지는 사람 이름을 불렀는데 오늘은 직함이 먼저 입을 연다
참 묘하다 권력은 의자가 아니다 사람 속에 숨어 있던 키를 늘리는 비료다
작은 교만은 큰 교만으로 자라고 작은 욕심은 넝쿨이 되어 담장을 넘는다
어제의 머슴은 사라지고 오늘의 나리만 남는다
도시는 안다 골목도 안다 시장 바닥의 생선도 안다 경로당 화투패도 안다 택시 기사도 안다 강아지도 안다 저 꽃은 철이 되면 다시 핀다는 것을
4 년은 참 이상한 시간이다 분노를 퇴비로 만들고 실망을 낙엽으로 만들고 기억을 먼지로 만든다 처음에는 속았다고 말한다
다음에는 실망했다고 말한다 그다음에는 욕을 한다 그다음에는 잊는다
망각은 참 부지런한 청소부다 사람들 가슴에 남은 분노를 밤마다 쓸어간다
4 년 뒤 유월은 다시 온다 들판은 다시 푸르러진다 머슴꽃도 다시 핀다 꽃은 여전히 아름답다 허리는 다시 낮아지고 이마는 다시 바닥을 찾고 입술은 다시 국민을 노래한다
사람들은 그 꽃을 바라본다 어디선가 본 듯한 꽃인데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낯익은 연극인데 첫 공연처럼 박수를 친다.
참 이상한 일이다 배우는 대사를 잊지 않는다 관객만 줄거리를 잊는다 정치인은 약속을 버린다 국민은 기억을 버린다 한쪽은 버리는 재주가 있고 한쪽은 잊는 재주가 있다
유월의 바람이 분다 현수막들이 펄럭인다 그 모습이 마치 낡은 허물을 벗고 새 허물을 갈아입는 뱀들의 군무 같다
세상은 선거를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부른다 가만히 바라보면 꽃보다 더 많이 피어나는 것이 있다
망각이다 망각이 해마다 만개하기에 머슴꽃도 해마다 지지 않고 피어난다
투표함은 종이를 세고 세월은 사람을 센다
역사는 당선자를 기록하고 하늘은 반복되는 속임수보다 반복해서 속아주는 인간의 슬픔을 기록한다
유월의 들판 끝에서 머슴꽃은 또 흔들린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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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진짜 머슴인가
유월의 햇살은 유난히 뜨거웠다. 선거를 하루 앞둔 거리에는 현수막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전봇대마다 후보들의 얼굴이 걸려 있었고, 사거리마다 확성기 소리가 흘러나왔다.
대한민국은 선거철만 되면 거대한 연극 무대가 된다. 평소에는 만나기 어려웠던 사람들이 골목마다 나타나 악수를 청하고, 이름을 불러주고, 허리를 숙인다.
그날도 그랬다. 한 후보가 시장 입구에서 큰절을 하고 있었다. 시멘트 바닥이었다.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붙였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을 찍었고, 수행원들은 연신 웃으며 인사를 했다. 후보는 연거푸 허리를 숙였다.
“머슴이 되겠습니다.” “종이 되겠습니다.” “국민만 바라보겠습니다.”
참 듣기 좋은 말들이었다. 말만 들으면 이 나라에는 머슴이 너무 많아서 걱정일 지경이었다.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살아오면서 참 많은 큰절을 보았다. 설날 큰절도 보았고, 제사상 앞의 큰절도 보았고, 스승에게 올리는 큰절도 보았다. 그런데 표 앞에서 하는 절만큼 간절한 절은 별로 보지 못했다.
표는 참 신기한 물건이다. 돈보다 사람을 더 낮게 만들고, 권력보다 사람을 더 간절하게 만든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다. 후보는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수행원들도 따라갔다. 확성기 소리도 멀어졌다. 시끌벅적하던 거리는 다시 평소의 얼굴을 되찾았다.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몇 개의 빈 생수병과 비닐봉지였다. 누군가 마시다 버린 물병. 누군가 손에 들고 있다가 버린 홍보용 비닐봉지. 바람에 밀려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방금 전까지 국민을 섬기겠다고 외치던 자리였다. 참 묘한 풍경이었다. 말은 떠났고 쓰레기만 남았다.
그때 길 건너편에서 한 사람이 걸어왔다. 반백의 중년이었다. 머리카락 절반쯤은 세월의 눈을 맞은 듯 희어 있었다. 특별한 차림도 아니었다. 양복도 아니고 넥타이도 없었다. 가슴에 명찰도 없었다. 누구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천천히 걸어오다가 바닥에 흩어진 물병들을 바라보았다.
한참 바라보았다. 마치 무언가 생각하는 사람처럼. 그러더니 허리를 굽혔다. 빈 물병 하나를 주웠다. 비닐봉지 하나를 주웠다. 구겨진 홍보물도 집어 들었다. 손에 든 봉지 안에 차곡차곡 담기 시작했다.
아무 말도 없었다. 누가 시킨 일도 아니었다. 주변에 카메라도 없었다. 박수를 치는 사람도 없었다. 인터뷰를 하는 기자도 없었다. 그는 그저 쓰레기를 줍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조금 전 큰절을 하던 후보보다 그 사람이 더 크게 보였다.
방금 전까지 머슴이 되겠다고 말하던 사람은 떠났는데,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은 아무 말없이 머슴의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은 국민을 섬기겠다고 말했다. 한 사람은 말 없이 거리를 섬기고 있었다.
한 사람은 표를 모으고 있었고, 한 사람은 쓰레기를 모으고 있었다.
그 차이는 생각보다 컸다. 정치는 말로 시작된다. 삶은 행동으로 증명된다. 우리는 대개 말을 따라간다. 화려한 약속에 귀를 기울이고, 멋진 연설에 박수를 보낸다.
정작 세상을 조금씩 바꾸는 것은 거창한 말이 아니다. 누군가 떨어뜨린 쓰레기 하나를 줍는 손이다. 누군가 외면한 일을 대신하는 마음이다. 누군가 보지 않는 곳에서도 같은 태도를 유지하는 양심이다. 그 중년 사내는 쓰레기를 줍다가 혀를 한 번 찼다. 짧은소리였다.
“쯧.”
그 소리가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그 안에는 많은 말이 들어 있었다.
국민을 사랑한다는 말보다, 봉사하겠다는 말보다, 헌신하겠다는 말보다, 더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 듯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머슴이 있는지도 모른다. 머슴이 되겠다고 말하는 사람. 머슴처럼 살아가는 사람. 전자는 선거철마다 만난다. 후자는 평생 몇 번 만나기 어렵다.
선거는 끝난다. 현수막은 걷힌다. 구호는 사라진다. 약속은 흐려진다. 시간은 모든 것을 지워버린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잊히지 않는 장면들이 있다. 시멘트 바닥에 이마를 붙이던 후보의 모습보다, 그가 떠난 뒤 말없이 물병을 줍던 반백의 중년 남자의 등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사람은 말로 자신을 설명한다. 행동은 그 사람을 증언한다.
그날 거리에서 두 개의 허리를 보았다.
하나는 표를 향해 숙여졌고, 하나는 양심을 향해 숙여졌다. 어느 허리가 더 낮았는지, 어느 허리가 더 아름다웠는지,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유월의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서 빈 물병 몇 개가 사라졌고, 한 사람의 품격은 외려 더 선명하게 남았다.
ㅡ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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