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춘 시인의 시 《랑》을 읽고 ㅡ청람 김왕식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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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
시인 서정춘
랑은
이음새가 좋은 말
너랑 나랑 또랑말 소리로 만나서
사랑하기 좋은 말
ㅡ 시 <랑>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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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과 물 사이에 놓인 작은 다리 ― 서정춘 시인의 시 《랑》을 읽고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서정춘 시인의 시는 크지 않다. 들고 다닐 수 있을 만큼 작다.
손바닥에 올려놓으면 돌멩이 같고,
귀에 대면 또랑물 소리가 난다.
《랑》은 특히 그렇다.
“랑은 이음새가 좋은 말”
시인은 단 세 줄로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다.
언어를 설명하지 않는다. 언어가 건너는 다리를 보여준다.
너랑
나랑
사랑
세 단어는 따로 서 있지 않는다.
개울을 건너는 징검돌처럼 하나가 다음 하나를 부른다.
서정춘 시인 시의 특징은 여기에 있다. 크게 말하지 않는다.
말과 말 사이의 물소리를 들려준다.
의미보다 숨결이 먼저 도착한다.
ㅡ
피아노랑
피아니스트 박지나 님이 서정춘의 시 <랑>에서 영감을 얻어 여러 또랑물 소리를 모시고
연주 동아리 이름을 지은 거다
정녕, 랑은 이음새가 긴 온음표 같은 것
ㅡ 시 <피아노랑> 전문
《피아노랑》도 같은 결이다. 피아노는 원래 건반의 악기다.
서정춘 시인의 시 안으로 들어오면 물의 악기가 된다.
박지나의 손끝에서 건반은 또랑물이 되고,
또랑물은 음표가 된다.
사람들은 연주를 듣는다.
시인은 이음새를 듣는다.
랑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고 물과 물 사이를 잇고 음과 음 사이를 잇는다.
한 음이 끝난 자리에서 다음 음이 시작되는 길목 그곳에 랑이 앉아 있다.
정녕, 랑은 온음표보다 길고 침묵보다 따뜻한 우리말의 작은 다리다.
서정춘 시인은 평생 그 다리를 놓아온 시인이다.
한 줄의 시로 사람 과 사람 사이에.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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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춘 시인께
선생님 시《랑》을 읽었습니다.
읽었다기보다 한 글자 앞에 오래 앉아 있었습니다.
세상에는 긴 말이 많습니다. 설명도 많고 주장도 많고 외침도 많습니다. 그런데 시인님은 겨우 한 글자를 내어놓으셨습니다.
랑.
그 한 글자가 제게는 작은 낱말이 아니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인 징검다리 같았습니다.
살아오며 참 많은 사랑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노래에도 있었고 소설에도 있었고 광고에도 있었고
수없이 많은 시 속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인님은 사랑에서 ‘사’를 덜어내셨습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글자는 줄었는데 정은 더 깊어졌습니다.
말은 짧아졌는데 울림은 더 멀리 갔습니다.
‘랑은 이음새가 좋은 말’
이 대목에서 한참을 머물렀습니다.
세상을 살아보니 무너지는 것은 대개 크고 거창한 것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작은 이음새가 닳아 없어질 때 관계는 금이 가고, 가정은 흔들리고, 사회는 메말라갔습니다.
선생님은 그 이음새 하나를 살려내기 위해 평생 시를 써오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피아노랑》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시인님 시 속에서는 피아노도 악기가 아닙니다. 건반과 건반 사이 음표와 음표 사이 침묵과 침묵 사이를 이어주는 손길이 됩니다.
시인님의 시는 늘 그런 것 같습니다. 돌을 노래해도 사람을 말하고 바람을 노래해도 사람을 말하고 꽃을 노래해도 사람을 말합니다.
겉으로는 사물을 쓰고 있지만 실상은 사람의 체온을 쓰고 있습니다.
요즘 세상은 자꾸 커지려 합니다. 더 크게 말하려 하고 더 많이 가지려 하고 더 높이 올라가려 합니다.
시인님의 시는 반대 방향으로 걸어갑니다. 줄이고 비우고 덜어내고 작아집니다.
참 신기한 일입니다. 큰 것들은 세월 속에 사라지는데, 작은 것들은 오래 남습니다. 거대한 건물보다 어머니의 한마디가 오래 남고, 화려한 연설보다 친구의 짧은 위로가 오래 남습니다.
시인님의 “랑”도 그렇습니다.
한 글자에 불과한데 한 사람의 생애보다 길게 남습니다.
선생님
저는 가끔 좋은 시란 무엇일까 생각합니다. 기교가 뛰어난 시일까 이미지가 화려한 시일까 철학이 깊은 시일까
《랑》을 읽고 나니 답이 조금 보입니다.
좋은 시는 사람의 마음속에 조용히 의자를 하나 놓아주는 시가 아닐까 싶습니다.
시인님의 시는 늘 의자 하나를 놓아줍니다.
지친 마음이 잠시 앉아갈 수 있도록 외로운 영혼이 기대어 갈 수 있도록 말라가는 세상이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도록
선생님께서 평생 다듬어온 시어들은 칼날처럼 날카로운 언어가 아니라 닳고 닳아 손때 묻은 나무 손잡이 같습니다.
잡으면 따뜻하고, 오래 쥐고 있어도 아프지 않습니다. 그것이 서정춘 시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 사람은 무엇으로 기억될까요. 남긴 재산일까요 남긴 명예일까요 아마도 아닐 것입니다.
누군가의 가슴속에 남겨놓은 따뜻한 한 글자. 그것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이미 오래전에 그 한 글자를 남기셨습니다.
랑.
그 한 글자가 수많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사람과 사람을 잇고 외로움과 외로움을 잇고 오늘과 내일을 잇고 있습니다.
시인님의 시를 읽고 있노라면 좋은 시는 좋은 사람이 남긴 숨결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 오래도록 건강하게 지내시길 바랍니다.
선생님의 “랑”이 앞으로도 많은 사람의 가슴속에서 따뜻한 다리로 놓이기를 소망합니다.
김왕식 올림
□ 서정춘 선생님
□ 서정춘 시인 시집 《하류》, 《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