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리 길 너머에 두고 온 것 ㅡ청람 김왕식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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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리 길 너머에 두고 온 것
십 리 길이었다 아침 해가 산마루에 걸리기 전에 책보 하나 어깨에 둘러메고 흙길을 밟으며 학교를 향해 걸었다
신발 밑창은 얇았고 차디찬 바람은 발가락까지 드나들었다
그래도 하늘은 넓었고 산은 늘 우리 편이었다
점심이라야 보리밥 한 덩이 김치 한 조각
양은 도시락 뚜껑을 열면 허기가 먼저 김을 피워 올렸다
한창 자랄 나이의 배는 보리밥 한 숟갈로는 달래지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면 눈짓 하나에 녀석들이 모였다
저기다 무밭이다 들키지 말자
작전이라도 세우듯 밭두렁을 타고 기어가 흙 속에 박힌 무를 뽑았다
뽑히는 소리가 어찌 그리 시원하던지 옷소매에 대충 문질러 한입 베어 물면 달큰한 물이 목구멍으로 흘러내렸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그때였다
이놈들!
천둥 같은 고함 돌아보니 혹부리 영감이 삽자루를 들고 달려왔다
우리는 메뚜기 떼처럼 흩어졌다
누군가는 논에 빠지고 누군가는 신발을 잃고 누군가는 무를 안고 도망쳤다
끝내 붙잡힌 녀석은 귀를 잡힌 채 호박 넝쿨처럼 질질 끌려갔다
그날 저녁 종아리는 불이 났고 눈물은 콧물과 섞였지만
다음 주가 되자 배고픔은 매를 잊게 했다
세월이 산 몇 개를 더 넘었다
무밭은 사라지고 논은 아파트가 되었으며
혹부리 영감도 흙으로 돌아갔다
녀석들은 회사 사장이 되었고 교수가 되었고 할아버지가 되었다
그런데도 가끔 고향에 가면 가슴 한쪽에서 무 하나 뽑히는 소리가 난다
아직도 십 리 길 끝 어딘가에서는 책보를 둘러멘 소년들이 허기를 품은 채 웃고 있고
혹부리 영감은 일부러 늦게 쫓아오고 있는 것만 같다
돌이켜 보면 그 무 한 개가 배보다 먼저 가난한 시절의 우정을 키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ㅡ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