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

칡과 등나무 [葛藤] ㅡ청람 김왕식

칡과 등나무 [葛藤] ㅡ청람 김왕식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칡과 등나무 [葛藤]

고향집 뒤란을 지나 둔덕 하나 있었다

비가 오면 흙냄새가 먼저 피어오르고 해가 지면 풀벌레 울음이 저녁밥 짓는 연기보다 먼저 내려앉던 곳

그 둔덕에는 참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몇십 년 바람을 견딘 늙은 기둥 같은 나무 그 곁에 칡이 살았다 등나무도 살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칡은 늘 왼쪽으로만 돌았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참나무 허리를 끌어안고 고집스럽게 왼쪽으로 감아 올랐다

등나무는 또 달랐다 한 번도 왼쪽으로 간 적이 없었다 참나무 곁을 맴돌며 오른쪽으로만 돌았다

봄에도 여름에도 가을에도

그랬다

한 덩굴은 왼쪽 한 덩굴은 오른쪽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았다

마주 보며 걷지 못하고 끝내 엇갈려 지나갔다

어른들은 그것을 갈등(葛藤)이라 불렀다

칡 갈(葛) 등나무 등(藤)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감겨 오르는 두 덩굴의 이름을 빌려 사람들 다투는 세상을 설명했다

어린 시절에는 몰랐다 왜 하필 싸움을 갈등이라 부르는지

둔덕 아래에는 여섯 남매가 살고 있었다

아침이면 밥상머리에서 다투고 낮이면 고무줄 하나를 두고 다투고 저녁이면 마당을 차지하려 다투었다

형은 형대로 옳았고 동생은 동생대로 억울했다

울음소리와 웃음소리가 한 지붕 아래서 번갈아 피어났다

지금 생각하면 둔덕 위 칡과 등나무가 밤마다 몰래 내려와 우리 마음에 씨앗을 심어놓고 간 듯하다

한 녀석은 왼쪽으로 우기고 한 녀석은 오른쪽으로 우겼다

아버지 말씀도 어머니 타이름도 그 순간에는 들리지 않았다

참 신기한 일이다 칡과 등나무는 평생 엇갈려 감겼는데 정작 쓰러지지는 않았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돌면서도 한 그루 참나무를 함께 붙들고 살았다

세월이 오래 흘렀다

둔덕의 흙도 낮아지고 참나무는 더 굵어졌으며 여섯 남매 머리에도 하얀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시방 알았다

갈등은 사람이 잘못 살아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서 생기는 것임을

칡이 칡인 채 살아가고 등나무가 등나무인 채 살아가듯 사람도 저마다 감기는 방향이 다르다는 것을

고향에 가면 둔덕은 아직 남아 있다

칡은 여전히 왼쪽으로 돌고 등나무는 여전히 오른쪽으로 돈다

누구 하나 이긴 적도 없고 누구 하나 진 적도 없다

그 아래 여섯 남매의 웃음과 울음은 낡은 풍금 소리처럼 바람에 섞여 흐른다

돌아보면 한집에서 살아낸다는 것은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일이 아니라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감기면서도 끝내 같은 뿌리를 잊지 않는 일인지 모른다.

둔덕 위 참나무는 오늘도 아무 말 없이 서서 칡과 등나무를 품고 있다.

ㅡ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