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사람을 닮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말을 닮아간다
말이 사람을 닮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말을 닮아간다 2026.06.11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말이
사람을 닮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말을 닮아간다
가끔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된다. 어떤 사람은 얼굴이 먼저 떠오르지 않는다. 대신 말이 떠오른다.
“괜찮아요.” “천천히 하세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 사람의 얼굴은 흐릿해져도 그 말은 오래 남는다.
반면 어떤 사람은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차를 타고, 높은 자리에 앉아 있어도 이상하게 마음이 가까워지지 않는다. 말이 거칠기 때문이다. 말에는 그 사람의 재산보다 더 많은 것이 담겨 있다.
말은 마음의 지문이다. 감출 수 없는 영혼의 무늬다. 시장에 가 보아도 알 수 있다. 과일을 파는 두 상인이 있다.
한 사람은 손님이 물건을 만져 보기만 해도 얼굴을 찌푸린다. “살 것도 아니면서 왜 자꾸 만져요?”
한 사람은 웃으며 말한다. “천천히 보세요. 과일도 사람도 잘 보고 만나야지요.”
신기하게도 손님은 두 번째 가게에 더 오래 머문다. 과일이 아니라 말의 온기를 사는 것이다.
병원도 그렇다. 환자는 의사의 처방만 받으러 오는 것이 아니다. 불안을 안고 온다. 두려움을 안고 온다.
“별것 아닙니다. 금방 좋아집니다.”
그 한마디에 환자의 얼굴이 풀린다. 약은 약국에서 받지만 위로는 사람에게서 받는다. 말의 힘이다.
가정은 더욱 그렇다. 가족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면서 가장 상처를 많이 주는 사람들이다. 낯선 사람에게는 조심하면서도 정작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는 말을 함부로 쏟아낸다.
“그것도 못 하냐?” “왜 그렇게 답답하냐?” “당신은 맨날 그래.”
그 말은 공중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상대의 가슴 어디엔가 박힌다. 못이 되어 남는다.
반대로 “애썼네.” “고생 많았어.” “당신 덕분이야.”
그 말도 남는다. 씨앗이 되어 남는다. 말은 늘 무언가를 심는다. 상처를 심거나 사랑을 심거나.
어느 겨울날이었다. 눈이 많이 내렸다. 한 노인이 미끄러운 길을 조심조심 걷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젊은이가 다가와 팔을 잡아 드렸다. 노인은 연신 고맙다고 했다. 젊은이는 웃으며 말했다.
“별말씀을요. 저는 순간 어르신이 제 부모님과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짧은 말이었다. 그런데 노인의 눈가가 젖었다. 팔을 잡아 준 것보다 그 말이 더 따뜻했던 것이다.
말은 이렇게 사람의 체온이 된다. 세상은 점점 빠르게 변한다. 인공지능이 글을 쓰고, 기계가 사람의 일을 대신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런데 끝내 기계가 흉내 내지 못하는 것이 있다. 사람의 마음이 담긴 말이다.
“기다렸어요.” “보고 싶었습니다.” “괜찮으신가요?” “제가 함께하겠습니다.”
이 말들은 정보가 아니다. 온기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흐르는 보이지 않는 강이다. 아름다운 말은 상대만 변화시키지 않는다. 말하는 사람도 바꾼다. 매일 불평하는 사람의 얼굴은 점점 굳어진다. 매일 남을 험담하는 사람의 눈빛은 점점 날카로워진다.
반대로 감사하는 말을 자주 하는 사람은 얼굴이 부드러워진다. 칭찬하는 사람은 표정이 밝아진다. 따뜻한 말을 하는 사람은 마음이 먼저 따뜻해진다. 향수를 뿌리면 자기 몸에도 향기가 남듯이, 고운 말을 하면 그 향기가 가장 먼저 자기 영혼에 스민다. 그래서 말은 마음의 결과이면서 동시에 마음의 스승이다. 처음에는 마음이 말을 만든다. 시간이 지나면 말이 다시 마음을 만든다.
봄날 매화나무를 보라. 꽃은 하루아침에 피지 않는다. 겨울 내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꽃눈을 키운다.
아름다운 말도 그렇다.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는다.
배려를 배우고, 감사를 익히고, 용서를 연습하며 조금씩 피어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얼굴이 고운 사람이 아니다. 말이 고운 사람이다. 말 한마디에 마음이 쉬어 가고, 말 한마디에 눈물이 마르고, 말 한마디에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 사람. 그런 사람이 곁에 있으면 세상은 아직 살 만한 곳이 된다.
사람은 말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평생 자신이 사용한 말에 의해 만들어진다. 말이 꽃을 닮으면 마음도 꽃을 닮고, 말이 햇살을 닮으면 마음도 햇살을 닮는다.
아름다운 말은 입술에서 끝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인생이 되어 오래도록 피어난다.
ㅡ청람 김왕식
댓글
로그인 없이 바로 남길 수 있습니다. 나중에 본인이 수정·삭제하려면 이 댓글의 비밀번호를 정해 주세요. 서로 예의를 지켜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