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입은 별이 남긴 꽃 한 송이 ― 《국화 옆에서》

― 《국화 옆에서》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
국화 옆에서
시인 서정주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
상처 입은 별이 남긴 꽃 한 송이 ― 미당의 《국화 옆에서》를 읽으며
청람 김왕식 문학평론가
문학사에는 이상한 역설이 있다. 인간은 완전하지 않은데 작품은 완전에 가까워지는 경우가 있다. 미당의 《국화 옆에서》가 그렇다. 이 시를 읽을 때마다 독자는 먼저 국화를 보지 않는다. 꽃보다 먼저 시간을 본다.
국화는 어느 날 갑자기 피지 않는다. 소쩍새의 목울음이 뿌리가 되고, 먹구름 속 천둥이 줄기가 되며, 무서리가 마지막 꽃잎이 되어 비로소 세상 밖으로 밀려 나온다.
미당은 꽃을 그린 것이 아니다. 한 존재가 아름다움에 도달하기까지 견뎌야 했던 우주의 긴 통증을 그렸다.
소쩍새는 새가 아니다. 봄의 진통이다. 천둥은 날씨가 아니다. 성장의 진통이다.
무서리는 계절이 아니다. 완성을 앞둔 존재가 통과해야 할 마지막 관문이다. 국화 한 송이 뒤에 숨어 있는 저 거대한 기다림. 미당은 꽃잎보다 보이지 않는 시간을 먼저 피워 올린다.
이 시가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 가운데 하나가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누구의 인생에도 국화 한 송이는 있기 때문이다. 젊은 날의 눈물, 끝내 이루지 못한 사랑, 가슴 한쪽에 오래 묻어둔 그리움. 독자는 국화를 읽다가 결국 자기 생애를 읽게 된다.
특히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라는 대목은 놀랍다. 국화는 식물이 아니다. 혈육이 된다. 계절은 가족이 된다. 꽃은 기억이 된다. 미당의 언어는 사물을 설명하지 않는다. 사물을 사람으로 바꾸어 놓는다.
한국어가 가진 정서적 혈연성을 가장 아름답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당은 시를 쓴 사람이 아니라 언어 속에 숨은 체온을 발견한 사람이었다.
그의 시어는 마치 오래된 한옥 대청마루 같다. 햇빛이 스며들고, 바람이 머물고, 사람의 체취가 남는다.
한국 현대시의 많은 시인들이 언어를 다루었지만, 미당은 언어를 살게 했다. 하여, 사람들은 그를 “한국의 시선(詩仙)“이라 불렀다. 시가 인간을 떠나 하늘 가까이 올라갈 수 있다면, 그 정상 부근에 미당의 이름 하나쯤 새겨져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생애는 꽃밭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의 시가 국화라면, 그의 삶은 국화 옆의 그림자였다. 일제강점기 친일 행적, 권력과의 근접성, 군사정권 시절의 순응적 태도는 오늘날까지도 한국 문학사의 가장 불편한 질문으로 남아 있다.
한 손에는 눈부신 꽃이 들려 있고, 다른 손에는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 남아 있는 셈이다. 그 얼룩은 시간이 지나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문학이 아름답다고 해서 역사가 용서되는 것은 아니다. 역사가 엄정하다고 해서 문학의 성취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미당이라는 이름 앞에서 한국 문학은 늘 두 개의 거울 사이에 서게 된다. 하나는 시를 비추는 거울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을 비추는 거울이다.
시는 찬란하다. 인간은 복잡하다. 그 간극이 바로 미당이라는 거대한 논쟁의 본질이다.
《국화 옆에서》는 국화에 관한 시가 아니다. 상처가 아름다움으로 변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를 남긴 시인 자신 또한 한국 문학사의 가장 빛나는 별이자 가장 깊은 상처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다.
국화는 지금도 피고 있다. 꽃은 여전히 아름답다. 꽃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예전보다 조금 더 복잡해졌다. 아마 문학이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한 송이 꽃을 사랑하면서도 그 꽃이 피어난 땅의 역사를 함께 바라보게 만드는 것.
미당의 국화는 아직도 피어 있다. 찬란함과 그림자를 한 줄기 줄기에 함께 매단 채.
ㅡ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