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애 낀 차창 속 얼굴 ㅡ청람 김왕식
성애 낀 차창 속 얼굴 2026.06.13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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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애 낀 차창 속 얼굴
차디찬 새벽은 늘 정직하다. 누가 부자이고 누가 가난한지 묻지 않는다. 누가 사장이고 누가 일용직인지도 따지지 않는다.
새벽 네 시만 되면 세상은 모두 같은 얼굴이 된다. 졸린 눈. 무거운 어깨. 덜 깬 몸. 어젯밤 노동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왔다. 씻었다고 하기에도 민망하다. 수건으로 하루의 먼지를 대충 훔쳐낸 정도였다. 방바닥에 몸을 눕힌 것이 아니라 거의 부려 놓았다. 몸은 이미 잠들어 있었고 마음만 겨우 뒤따라 들어갔다.
얼마나 잤을까. 알람 소리가 울렸다. 잠이 깬 것이 아니다. 노동이 다시 나를 깨웠다. 몸을 추슬러 첫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세상 사람들이 아직 꿈속을 헤맬 시간. 첫 버스 안에는 대여섯 명이 앉아 있었다. 앉아 있다는 표현은 조금 부정확하다. 몸을 의자에 박아 놓았다는 말이 더 어울린다. 모두들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생각이 많아서가 아니다. 잠이 부족해서다. 고개를 들 힘조차 아껴야 하는 시간이다.
버스는 어둠을 싣고 달렸다. 창밖은 아직 밤이었다. 가로등 불빛 몇 개가 졸음에 겨운 별처럼 흔들렸다.
그때였다. 성애 낀 차창에 얼굴 하나가 비쳤다. 무심코 바라보다가 깜짝 놀랐다.
웬 노인이 앉아 있는 것이다. 이마에는 깊은 밭고랑이 몇 줄 지나가고, 눈가에는 세월이 남긴 실금이 촘촘했다. 머리카락은 어느새 밤새 내린 서리처럼 희끗했다.
낯선 얼굴이었다. 순간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혹시 내 뒤에 누가 앉아 있나. 없었다. 다시 차창을 보았다. 노인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야 알았다. 그 노인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참 이상한 일이다. 거울은 매일 보는데 세월은 보이지 않는다. 하루는 보이지 않는다. 한 달도 보이지 않는다.
불현듯 십 년이 한꺼번에 보인다. 젊음은 도둑처럼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이슬처럼 증발하는 모양이다. 매일 조금씩 줄어드니 없어진 줄도 모른다.
한참 동안 차창을 바라보았다. 성애가 녹아내리다 만 차장에 서글픔보다는 웃음이 먼저 났다. 평생 늙은 사람들을 보며 살았는데 정작 자신이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줄은 몰랐다. 젊은 날에는 예순만 되어도 할아버지인 줄 알았다.
이제 그 나이를 훌쩍 넘겼는데도 마음속에는 여전히 철없던 청년 하나가 뛰어다닌다. 몸은 정류장에 먼저 도착했는데 마음은 아직 출발도 하지 못한 셈이다. 슬며시 허리를 폈다. 구겨진 옷깃도 만져 보고 흩어진 머리카락도 손으로 쓸어 올렸다. 누가 보는 것도 아니다. 버스 안 사람들은 모두 자기 졸음과 싸우느라 바쁘다. 그런데도 자세를 고쳤다. 차창 속 노인에게 예의를 차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노인도 참 고생이 많았다. 가난한 시절을 즈려 밟고, 자식들을 키웠고, 먹고사는 일에 등을 내주었고, 비바람 오는 날에도 쉬지 못했다. 그 몸으로 여기까지 왔다. 칭찬 한마디 제대로 듣지 못했을지라도 참 수고 많으셨다고, 차창 속 얼굴에게 작게 인사하고 싶어졌다. 버스는 노동 현장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서쪽 하늘 끝이 조금씩 밝아졌다. 새벽은 또 하루를 꺼내 놓고 있었다. 차창 속 노인도 따라 웃었다. 주름은 늘었어도 아직 일하러 갈 곳이 있고, 기다리는 하루가 있고, 새벽 첫 버스를 탈 수 있다는 것. 어쩌면 그것도 축복인지 모른다.
버스는 흔들리고 차창의 노인은 흔들리고 세월도 흔들리고 있었다. 그 흔들림 속에서 오늘도 한 사람이 늙어 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고 있었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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