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

긴 강을 건너지 않은 자의 짧은 다리 ㅡ청람 김왕식

긴 강을 건너지 않은 자의 짧은 다리 2026.06.19
긴 강을 건너지 않은 자의 짧은 다리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긴 강을 건너지 않은 자의 짧은 다리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요즘 시단을 바라보노라면 생각이 깊어진다.

씨앗 하나 심어 놓고 숲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 돌멩이 하나 주워 들고 산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서너 줄 적어 놓고 우주를 담았다고 말하는 시인도 적지 않다.

짧음은 미덕이다. 군더더기를 덜어낸 언어는 아름답다. 침묵 속에서 더 크게 울리는 종소리 같은 시도 있다. 백 마디 말보다 한 줄이 더 깊은 울림을 남길 때도 있다.

문제는 짧음이 아니다. 짧음을 만들어 낸 시간의 깊이다. 세상은 결과만 본다. 국 한 그릇에 들어간 수백 번의 손길을 보지 못한다. 가을 들녘의 벼 한 알 속에 숨어 있는 봄의 흙냄새와 여름 장마와 농부의 굽은 허리를 보지 못한다.

짧은 시도 마찬가지다. 한 줄은 결코 한 줄이 아니다. 그 뒤에 숨어 있는 수천 권의 독서와 수만 시간의 사유와 셀 수 없는 퇴고가 응축된 결정체다.

김소월의 언어가 쉬워 보이는가. 백석의 시가 담백해 보이는가. 윤동주의 문장이 맑아 보이는가. 그 맑음 뒤에는 수많은 밤이 있다. 사람은 종종 마지막 모습만 보고 흉내를 낸다.

피카소의 추상화를 본다. 아이도 그릴 수 있겠다고 말한다. 허나 피카소는 평생 아이처럼 그리기 위해 싸운 사람이다. 열네 살에 이미 고전주의 화풍을 자유롭게 구사했다. 인체의 근육과 골격을 완벽하게 이해했다. 빛과 명암을 통달했다. 수천 장의 데생을 통과했다. 그 뒤에 비로소 선 하나로 황소를 그렸다. 사람들은 황소만 본다. 그 황소 뒤에 쌓인 수만 장의 데생은 보지 못한다.

시도 그렇다. 단 세 줄의 시를 쓰기 위해서는 먼저 삼백 줄의 시를 쓸 수 있어야 한다. 삼백 줄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서른 줄로 줄인다. 서른 줄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세 줄로 압축한다. 압축은 생략이 아니다. 압축은 농축이다. 물을 버리는 일이 아니다. 물을 증발시켜 진액만 남기는 일이다. 세 줄이 위대한 것은 짧아서가 아니다. 그 안에 장편소설 한 권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초심자들이 착각한다. 시는 짧아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여백이 중요하다는 말을 듣는다. 상징이 중요하다는 말을 듣는다. 그 말을 곧바로 형식으로 받아들인다. 여백은 생략이 아니다. 상징은 모호함이 아니다. 짧음은 빈곤이 아니다. 여백은 넘쳐흐르는 것을 덜어낸 자리다.

상징은 구체성을 통과한 언어다. 짧음은 충만함의 다른 이름이다. 텅 빈 창고를 보고 미니멀리즘이라 부르지 않는다.

가난을 절제로 착각해서도 안 된다. 언어가 부족한 것과 언어를 덜어낸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깊은 우물은 물소리가 적다. 얕은 웅덩이는 작은 돌 하나에도 소란스럽다.

침묵에도 자격이 있다. 간결함에도 이력이 있다. 짧은 시는 문학의 출발점이 아니라 종착역에 가깝다.

오랜 세월 언어를 갈고닦은 뒤에야 비로소 도달하는 풍경이다. 노승의 염주가 단순해 보이는 이유는 그 안에 평생의 기도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겨울나무가 아름다운 이유는 수천 장의 잎을 떠나보냈기 때문이다. 강이 바다에 이르러 말이 없어지는 이유는 이미 할 말을 모두 마쳤기 때문이다.

짧은 시를 쓰고 싶은가. 먼저 긴 강을 건너야 한다. 수많은 시를 읽어야 한다. 수많은 문장을 써야 한다. 자신의 문장이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는 시간도 지나야 한다. 그 과정을 통과한 뒤 남는 몇 줄은 다르다. 그 몇 줄은 언어가 아니다. 생애다.

명시는 짧아서 명시가 되는 것이 아니다. 긴 삶이 압축되어 있기 때문에 명시가 된다. 짧은 다리를 자랑하기 전에 먼저 긴 강을 건너야 한다. 강을 건너지 않은 자의 짧음은 빈칸일 뿐이다. 강을 건너온 자의 짧음은 한 편의 우주가 된다.

댓글

로그인 없이 바로 남길 수 있습니다. 나중에 본인이 수정·삭제하려면 이 댓글의 비밀번호를 정해 주세요. 서로 예의를 지켜 주세요.

  1. 불러오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