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

김훈의 문학관에 대한 단상 ㅡ청람 김왕식

김훈의 문학관에 대한 단상 2026.06.20
김훈의 문학관에 대한 단상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김훈

나는 문학이 인간을 구원하고, 문학이 인간의 영혼을 인도한다고 하는, 이런 개소리를 하는 놈은 다 죽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어떻게 문학이 인간을 구원합니까. 아니 도스토예프스키가 인간을 구원해? 난 문학이 구원한 인간은 한 놈도 본 적이 없어! 하하…. 문학이 무슨 지순(至純)하고 지고(至高)한 가치가 있어 가지고 인간의 의식주 생활보다 높은 곳에 있어서 현실을 관리하고 지도한다는 소리를 믿을 수가 없어요. 나는 문학이란 걸 하찮은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 세상에 문제가 참 많잖아요. 우선 나라를 지켜야죠, 국방! 또 밥을 먹어야 하고, 도시와 교통 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애들 가르쳐야 하고, 집 없는 놈한테 집을 지어줘야 하고…. 또 이런저런 공동체의 문제가 있잖아요. 이런 여러 문제 중에서 맨 하위에 있는 문제가 문학이라고 난 생각하는 겁니다. 문학뿐 아니라 인간의 모든 언어 행위가 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펜을 쥔 사람은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생각해 가지고 꼭대기에 있는 줄 착각하고 있는데, 이게 다 미친 사람들이지요. 이건 참 위태롭고 어리석은 생각이거든요. 사실 칼을 잡은 사람은 칼이 펜보다 강하다고 얘기를 안 하잖아요. 왜냐하면 사실이 칼이 더 강하니까 말할 필요가 없는 거지요. 그런데 펜 쥔 사람이 현실의 꼭대기에서 야단치고 호령하려고 하는데 이건 안 되죠. 문학은 뭐 초월적 존재로 인간을 구원한다, 이런 어리석은 언동을 하면 안 되죠. 문학이 현실 속에서의 자리가 어딘지를 알고, 문학하는 사람들이 정확하게 자기 자리에 가 있어야 하는 거죠.

ㅡ 월간조선 2002년 2월호에 당시 SBS보도국 오효진 국장과 인터뷰한 내용이다.

문학은 밥보다 낮은가 ― 김훈의 문학관에 대한 단상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2002년 2월호 월간조선에 실린 김훈과 오효진 당시 SBS 보도국장의 인터뷰는 오늘 다시 읽어도 충격적이다.

김훈은 특유의 거침없는 어법으로 문학이 인간을 구원한다는 믿음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문학은 인간 삶의 여러 문제 가운데 가장 하위에 놓인 것이며, 펜을 쥔 사람들이 세상의 꼭대기에 서 있다고 착각하는 순간 문학은 오만에 빠진다고 말한다.

그의 문장은 마치 불꽃 튀는 대장간의 망치 같다. 한 번 내리칠 때마다 오래된 관념들이 깨져 나간다. 그 망치가 겨눈 것은 문학 자체가 아니다. 문학을 신격화하는 태도, 문학을 현실 위에 군림하는 특별한 권위로 여기는 태도이다.

그 점에서 김훈의 문제 제기는 충분히 경청할 가치가 있다. 문학은 굶주린 사람에게 밥을 지어 줄 수 없다. 전쟁터의 병사에게 방탄복이 되어 주지도 못한다. 폭우로 무너진 제방을 복구하지도 못하고, 병든 사람의 수술대에 설 수도 없다. 나라를 지키는 국방이 중요하고, 시민의 생명을 지키는 의료가 중요하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육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문학은 다리를 놓지 못하고, 철도를 건설하지 못하며, 도시를 설계하지도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김훈의 말은 현실에 대한 냉엄한 인식이다. 문학은 결코 만능이 아니다. 문학은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도 아니다. 문학이 인간 위에 군림하는 순간 문학은 살아 있는 언어가 아니라 이념이 된다.

김훈은 그 위험을 경계한다. 그의 시선은 끝없이 땅을 향한다. 하늘을 향해 치솟는 관념보다 흙냄새 나는 현실을 더 신뢰한다. 그것은 김훈 문학의 강점이며 동시에 많은 독자들이 그의 글에서 발견하는 묵직한 진실이다.

그의 주장에는 분명 지나침도 존재한다. 문학의 허영을 비판하는 것과 문학의 힘을 축소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빵만으로 살아가지 않는다. 빵은 육체를 살린다. 문학은 삶의 이유를 묻는다. 집은 비를 막아 준다. 문학은 마음속에 내리는 비를 기록한다. 국방은 나라를 지킨다. 문학은 그 나라의 기억을 지킨다. 이 둘은 경쟁 관계가 아니다. 서로 다른 영역에서 인간을 떠받치는 두 개의 기둥이다. 김훈은 문학이 인간을 구원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역사 속에는 그 말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수많은 사례가 존재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읽고 절망의 끝에서 다시 삶을 선택한 사람들이 있다. 톨스토이의 작품을 통해 인간의 존엄과 사랑을 새롭게 발견한 독자들이 있다. 한 권의 책 때문에 삶의 방향이 바뀌고, 한 편의 시 때문에 죽음을 포기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문학사 곳곳에 남아 있다. 물론 그것은 의학적 구원이 아니다. 경제적 구원도 아니다. 인간의 정신과 영혼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변화임은 부정할 수 없다. 구원이라는 말이 반드시 종교적 의미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건너가는 일도 구원이다. 증오에서 용서로 나아가는 일도 구원이다. 자기 파괴의 충동에서 삶을 선택하는 일 역시 구원이다. 문학은 바로 그 영역에서 오래도록 인간과 함께해 왔다.

한국전쟁 당시 16세 인민군 병사의 가방 속에서 발견되었다는 톨스토이의 《부활》은 상징적이다. 총성과 포성이 뒤엉킨 전쟁터에서 한 청년은 소설책 한 권을 품고 있었다. 그 사실은 문학이 총보다 강하다는 뜻이 아니다. 문학이 밥보다 중요하다는 뜻도 아니다. 인간은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도 의미를 갈망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죽음이 곁에 서 있는 순간에도 인간은 이야기를 품는다.

문학은 바로 그 인간성의 마지막 불씨와 관계되어 있다. 문학은 세상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힘은 아닐지 모른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가장 오래된 힘 가운데 하나임은 분명하다. 김훈은 문학을 왕좌에서 끌어내렸다. 그 작업은 필요했다.

문학이 스스로를 과장하는 순간 문학은 현실과 멀어지기 때문이다. 문학을 지나치게 낮추는 것 또한 또 다른 오해를 낳는다.

문학은 왕이 아니다. 그렇다고 하찮은 하인도 아니다. 문학은 인간 문명의 기억 창고이다. 한 시대의 눈물과 희망, 사랑과 절망을 보존하는 거대한 저장소이다. 제국은 무너진다. 권력은 사라진다. 왕조는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난다. 이야기는 남는다.

칼은 영토를 넓힌다. 문학은 인간의 내면을 넓힌다. 권력은 사람을 복종시킨다. 문학은 사람을 성찰하게 한다. 국가는 법으로 유지된다. 문명은 이야기로 이어진다.

김훈의 문학관은 문학의 오만을 경계했다는 점에서 깊은 의미를 지닌다. 문학이 인간 정신에 미치는 영향력까지 부정하는 순간 그의 시선은 지나치게 현실주의의 한쪽 끝으로 기울어진다.

문학은 밥이 아니다. 그 말은 맞다. 인간은 밥만으로 살아가는 존재도 아니다. 문학은 인간을 당장 구원하지 못할 수 있다. 세상을 단숨에 바꾸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문학은 무너진 마음을 일으켜 세우고, 길을 잃은 영혼에게 방향을 건네며, 어둠 속을 걷는 사람 곁에 작은 불빛 하나 밝혀 놓는다. 인류가 수천 년 동안 문학을 버리지 못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문학은 삶의 중심에 군림하는 왕관이 아니다. 그렇다고 삶의 가장 아래에 놓인 장식품도 아니다. 문학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끝내 인간으로 남기 위해 품어 온 오래된 등불이다. 그 등불은 세상을 환하게 밝히지는 못한다. 다만 한 사람의 밤을 지나게 할 수는 있다. 문학의 힘은 어쩌면 바로 그곳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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