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

입매무새가 말해 준 평판 ㅡ 박흥식 선생

입매무새가 말해 준 평판 ㅡ  박흥식 선생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박흥식 선생님

입매무새가 말해 준 평판 ― 박흥식 선생을 처음 만난 날

사람을 처음 만나면 누구나 먼저 얼굴을 본다. 조금 더 지나면 눈빛을 본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목소리를 기억하게 된다. 그런데 아주 드물게는 입매가 먼저 말을 거는 사람이 있다.

이날이 그랬다. 그젯밤부터 장맛비가 세상을 통째로 씻어 내릴 듯 퍼붓더니, 어제 아침까지도 빗줄기는 좀처럼 그칠 줄 몰랐다. 우산 하나 챙겨 들고 청량리 차지혁 선생 연구실로 향했다. 빗물은 길을 적셨고, 사람들의 발걸음도 평소보다 조금은 느렸다. 비는 사람을 서두르지 못하게 하는 묘한 재주가 있다.

그곳에서 박흥식 선생을 처음 뵈었다. 곁에는 유재웅 선생이 함께했다. 두 분 모두 오래된 나무처럼 진중했다. 학문과 현장을 함께 걸어온 사람들에게서만 풍겨 나오는 깊이가 있었다. 굳이 자신의 이력을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이미 삶이 먼저 소개장을 내밀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시선은 자꾸 박흥식 선생의 입매로 향했다. 눈빛도 아니고, 손짓도 아니었다. 입매였다. 세상에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있다. 말을 잘하는 사람도 있다. 말을 아름답게 꾸미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말을 아껴야 할 때를 아는 사람은 흔하지 않다.

박흥식 선생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입은 다물고 있었지만 침묵은 조금도 비어 있지 않았다. 오히려 수많은 문장이 그 안에서 질서를 이루며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말을 꺼내기 전에 먼저 생각이 지나가고, 생각보다 먼저 품격이 지나가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문득 혼자 웃음이 났다. 평판을 연구한 사람이니 혹시 말 한마디도 허투루 하면 안 된다는 직업병이 생긴 것은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상상도 해 보았다. 평판관리 전문가가 괜히 실언했다가 다음 책 제목이 《평판이 과거다》가 되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그 짧은 농담 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곧 고개가 끄덕여졌다.

평판은 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축적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박흥식 선생의 저서 『평판이 미래다』는 기업의 생존 전략을 이야기한다. 기업의 재무제표보다 신뢰가 먼저이며, 광고보다 평판이 오래가고, 위기관리보다 평소의 품격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디지털 시대에는 기업도 개인도 하루아침에 평가받는다. 이름 하나, 사진 한 장, 댓글 하나가 신뢰를 세우기도 하고 무너뜨리기도 한다.

그런데 책장을 덮고 저자를 만나니, 책의 내용이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라 한 사람의 태도로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좋은 책은 저자를 닮는다. 더 좋은 저자는 자신의 책을 닮아 간다. 박흥식 선생의 입매는 그 사실을 조용히 증명하고 있었다.

우리는 흔히 평판을 남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느냐의 문제로 생각한다. 물론 그것도 맞다. 그러나 더 근원적인 평판은 내가 나를 어떻게 다스리며 살아왔는가에 대한 시간의 기록이다. 평판은 홍보가 아니다. 광고는 더욱 아니다. 평판은 오래된 습관이 얼굴에 남긴 주름이며, 수십 년의 선택이 목소리에 남긴 울림이며, 타인을 대하는 태도가 몸에 새긴 품격이다.

하여, 좋은 평판은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는다. 매일 조금씩 쌓이는 신뢰의 적금이다. 한 번의 박수보다 백 번의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 오래 기억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기업도 그렇다. 광고비를 아무리 많이 써도 신뢰를 잃으면 브랜드는 흔들린다. 반대로 위기를 맞더라도 평소 쌓아 온 신뢰가 깊으면 사람들은 기다려 준다. 결국 기업의 가장 큰 자산은 공장이 아니라 신뢰이며, 기술이 아니라 평판이다.

개인도 다르지 않다. 명함은 직함을 소개하지만 평판은 인격을 소개한다. 학력은 과거를 말하지만 평판은 현재를 증명한다. 재산은 숫자로 계산되지만 신뢰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자란다.

차지혁 선생 연구실에서 나눈 대화는 길지 않았다. 그런데도 오래 남는다. 사람은 많은 말을 해서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존재 자체가 하나의 문장이 될 때 기억된다.

돌아오는 길에도 빗방울은 여전히 떨어지고 있었다.

불현듯 생각이 들었다.

‘비는 하늘이 땅을 씻는 일이다. 평판은 시간이 사람을 씻는 일이다.’

세월은 누구에게나 질문 하나를 남긴다.

‘당신은 무엇을 말하며 살았는가가 아니라, 당신의 침묵은 얼마나 믿을 만했는가.’

이날 박흥식 선생의 입매는 그 질문에 먼저 답하고 있었다.

“말보다 깊은 침묵으로”. “이력보다 오래가는 품격으로”.

그것이야말로 평판이라는 이름의 가장 아름다운 웅변이었다.

□ 박흥식 선생님께

큰 나무는 바람을 붙잡지 않습니다.

숲이 먼저 그늘을 기억합니다.

깊은 강은 소리를 앞세우지 않습니다.

오랜 세월 낮은 곳을 흐른 물이 마침내 바다의 이름을 얻습니다.

선생님을 뵌 날,

한 사람의 입매에 한 권의 책보다 깊은 시간이 머물 수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쉽게 열리지 않는 입술은 신중함의 문이었고,

짧은 한마디는 오래 다듬은 삶의 결이었습니다.

평판이란 사람들이 만들어 주는 박수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같은 마음으로 살아온 시간의 향기임을

선생님의 모습이 먼저 말하고 있었습니다.

장맛비가 세상을 씻고 지나간 아침,

한 사람의 품격은 빗물에도 지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마음 한켠에 오래 새겼습니다.

꽃은 향기로 기억되고, 별은 빛으로 기억됩니다.

선생님은 신뢰라는 이름으로 오래 기억될 사람입니다.

ㅡ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