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

남겨진 물 한 병은 한 사람의 목숨보다 오래 산다

남겨진 물 한 병은 한 사람의 목숨보다 오래 산다 2026.07.11
남겨진 물 한 병은 한 사람의 목숨보다 오래 산다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남겨진 물 한 병은 한 사람의 목숨보다 오래 산다 ― 신뢰는 눈에 보이지 않는 샘을 파는 일이다

사막이 무서운 까닭은 모래가 많아서가 아니다. 믿을 것이 없다는 데 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길은 없고, 발자국은 바람이 먼저 지워 버린다. 하늘은 너무 높아 기도조차 메아리를 잃고, 태양은 시간을 삶이 아니라 생존으로 바꾸어 놓는다. 사막에서는 한 모금의 물이 한 권의 철학보다 귀하고, 한 사람의 신뢰가 황금보다 무겁다.

인간의 삶에도 이런 사막은 찾아온다. 실패가 연달아 문을 두드릴 때,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뒤, 병상에서 내일을 장담할 수 없을 때, 믿었던 사람이 등을 돌렸을 때, 우리는 모두 마음속에 하나의 사막을 품는다. 그 사막은 지도에도 없고 위성사진에도 잡히지 않는다. 오직 눈물만이 그 좌표를 알고 있다.

그때 사람은 묻게 된다.

‘정말 다시 살아갈 수 있을까.’

세상은 흔히 성공한 사람의 발자취를 이야기한다. 높은 산을 오른 사람의 깃발을 보여 준다. 정작 인간을 살리는 것은 정상의 깃발이 아니다. 이름도 남기지 않은 누군가가 남겨 둔 작은 물 한 병이다.

생각해 보면 인류의 역사는 거대한 영웅들이 만든 역사이기보다 이름 없는 사람들이 매일 채워 놓은 물 한 병의 역사였다.

어머니는 자식의 가슴에 물 한 병을 걸어 두고 떠난다. 그것을 사람들은 사랑이라 부른다. 스승은 제자의 영혼에 물 한 병을 남긴다. 그것을 사람들은 가르침이라 부른다. 농부는 내년의 씨앗을 남겨 둔다. 과학자는 다음 세대가 넘어설 디딤돌 하나를 놓는다. 시인은 절망의 밤에도 언어 하나를 꺼뜨리지 않는다. 그 모든 것이 누군가를 위한 물 한 병이다.

신뢰란 이상한 것이다.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그것이 사라지는 순간 세상은 한순간에 사막이 된다. 은행은 돈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신뢰로 세워지고, 국가는 법보다 먼저 신뢰 위에서 숨을 쉰다. 가족도, 친구도, 공동체도 결국 서로가 남겨 둔 물 한 병을 마시며 살아간다.

인간은 혼자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신뢰를 이어 마시는 존재다. 그래서 문명은 건물의 높이로 측정되지 않는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다음 사람을 위해 물 한 병을 다시 채워 두었는가로 측정된다.

불현듯 생각이 든다. 오늘 내가 누리는 대부분은 내 것이 아니다. 내가 쓰는 말은 수천 년 동안 누군가 다듬어 준 언어이고, 내가 걷는 길은 먼저 걸어간 사람들이 돌을 치워 놓은 길이며, 내가 읽는 책은 이름 모를 수많은 영혼이 밤을 새워 남겨 준 등불이다. 나는 내 힘만으로 여기까지 온 사람이 아니다. 수없이 많은 손길이 내 인생의 사막마다 물 한 병을 걸어 두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감사는 의무가 아니라 존재의 호흡이 된다. 사람은 무엇을 남기고 떠날 것인가. 큰 건물일 수도 있고, 많은 재산일 수도 있다. 그것도 아름답다. 그보다 오래 남는 것이 있다. 누군가 절망의 문턱에서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는 말 한마디, 흔들리는 등을 붙잡아 주는 손 하나, 끝내 사람을 믿게 만드는 작은 양심 하나.

그것들은 모두 물 한 병의 다른 이름이다. 인생은 오래 사는 경쟁이 아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의 갈증을 적셔 주었는가를 묻는 순례이다. 강은 자기 물을 마시지 않고, 나무는 자기 그늘에 쉬지 않는다.

꽃은 자기 향기를 맡지 않는다. 존재는 본래 자신을 위해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생명을 이어 주기 위해 피어난다.

인간도 다르지 않다. 누군가의 내일을 위하여 오늘의 물 한 병을 남겨 둘 때, 비로소 삶은 한 사람의 생애를 넘어 다음 세대의 희망이 된다.

떠나는 날, 우리의 이름은 잊힐지 모른다. 얼굴도 세월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남겨 둔 신뢰 하나, 사랑 하나, 양심 하나는 또 다른 누군가의 사막에서 샘물이 되어 흐를 것이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생애란 거창한 업적을 이루라는 명령이 아니라, 먼 훗날 이름조차 알 수 없는 한 사람을 위해 물 한 병을 다시 채워 두고 가라는 부탁인지도 모른다.

오늘 당신은 누구의 물 한 병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그리고 내일, 당신은 누구를 위해 그 물 한 병을 다시 채워 둘 것인가. 그 질문 하나가 인간을 문명으로 만들고, 삶을 영원으로 건너가게 한다.

ㅡ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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