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행성의 붉은 교정지 ㅡ청람 김왕식

행성의 붉은 교정지 2026.07.16
행성의 붉은 교정지

ㅡ청람 김왕식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행성의 붉은 교정지

청람 김왕식

지구는 원고를 한 번도 완성본이라 부른 적이 없다

계절마다 한 장씩 고쳐 쓰고 있었을 뿐이다

봄은 연둣빛 연필로 숲의 첫 문장을 적었고

여름은 강물의 여백을 조금 넓혀 주었다

가을은 낙엽으로 쉼표를 찍었으며

겨울은 눈이라는 지우개로 욕심 많은 발자국을 잠시 덮어 두었다

어느 해부터인가 붉은 교정 표시가 행성 곳곳에 번지기 시작했다

빙하 옆에는 삭제

강 하류에는 복원 필요

바다 위에는 플라스틱 과다

사막 가장자리에는 문장 붕괴

숲의 빈자리에는 생략 불가

인간은 그 붉은 표시를 석양이라고 불렀다

폭염이라고 불렀다

이상기후라고 불렀다

끝내 자신의 문장이라고는 부르지 않았다

지구는 아무 말 없이 교정을 계속했다

비를 보내고 바람을 보내고 폭풍을 보내며 붉은 줄을 조금씩 늘려 갔다

마지막 장에 하나의 질문만 남겨 두었다

“원고를 계속 쓰시겠습니까. 아니면 처음부터 다시 읽으시겠습니까.”

ㅡ청람

댓글

로그인 없이 바로 남길 수 있습니다. 나중에 본인이 수정·삭제하려면 이 댓글의 비밀번호를 정해 주세요. 서로 예의를 지켜 주세요.

  1. 불러오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