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

훈민정음 ― 한 나라가 처음 자기 목소리를 갖던 날

훈민정음 ― 한 나라가 처음 자기 목소리를 갖던 날 2026.07.19
훈민정음
― 한 나라가 처음 자기 목소리를 갖던 날

― 한 나라가 처음 자기 목소리를 갖던 날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훈민정음 ― 한 나라가 처음 자기 목소리를 갖던 날

처음에는 침묵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다

산은 푸르렀으나 백성의 슬픔은 기록되지 못했고 강은 천 년을 흘렀으나 어머니의 눈물은 물결 속에서만 번역될 뿐이었다

아이 하나 제 이름을 부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고 농부 하나 평생 흙을 갈다가도 마지막 유언 한 줄 남기지 못한 채 바람으로 돌아갔다 나라는 있었으나 백성의 말은 없었다 글은 높은 곳에 있었고, 삶은 낮은 곳에 있었다

그 먼 거리를 한 사람은 밤마다 걸었다 촛불 하나 동궁보다 낮게 타오르는 방 세종은 왕관보다 먼저 백성의 목소리를 들었다

세종은 알고 있었다. 칼은 나라를 세울 수는 있어도 백성의 마음까지 세우지는 못한다는 것을 법은 죄를 다스릴 수는 있어도 눈물의 문법은 배우지 못한다는 것을

하여, 그는 돌에 궁전을 새기지 않고, 사람의 입술에 새로운 우주를 심기 시작하였다

ㄱ은 첫새벽의 뼈가 되었고 ㄴ은 사람이 세상을 품는 겸손한 팔이 되었으며 ㅁ은 어머니가 아이를 부르는 따뜻한 입술이 되었고 ㅇ은 비어 있음으로 만물을 품는 하늘이 되었다

모음은 하늘과 땅과 사람을 잇는 보이지 않는 다리였다 점 하나가 하늘이 되었고 가로획 하나가 대지가 되었으며 사이에서 숨 쉬는 사람이 비로소 우주의 중심이 되었다

그날, 문자는 태어난 것이 아니었다 침묵이 입을 열었다 이름 없는 백성이 자기 이름을 처음으로 써 내려갔다

한 아이가 어머니를 적었고 한 노인이 그리움을 적었으며 한 연인이 사랑을 적었고 한 나라가 마침내 자기 영혼을 적기 시작하였다

궁궐은 허물어지고 왕조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며 권력은 수없이 주인을 바꾸었다

그런데도 ‘사랑’이라는 두 글자는 아직 살아 있고 ‘어머니’라는 세 글자는 오늘도 인류의 가장 깊은 곳을 울린다 문명은 높은 탑으로 기억되지 않는다 사람이 자기 마음을 자기 말로 말할 수 있게 한 그 한 번의 사랑으로 기억된다

훈민정음, 그것은 스물여덟 글자의 이름이 아니다

한 왕이 백성을 사랑한 길이었고 한 민족이 침묵을 넘어 인간이 되는 과정이었으며 오늘도 지구 어디선가 갓 글을 배운 아이가 처음으로 자기 이름을 써 내려가는 순간마다 다시 태어나는 인류의 가장 아름다운 새벽이다

ㅡ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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