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을 굶고라도 끝까지 읽어 보세요?
밥을 굶고라도 끝까지 읽어 보세요? 2026.07.22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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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단톡방에 올라온 글이다.
“밥은 굶더라도 끝까지 읽어달라”라고 간곡히 요청했다.
급히 읽었다.
하여. 생각한 바 있어 나의 생각 몇 줄 적었다.
덧붙인 글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이 또한 나의 사견일 뿐이다.
이 글에는
공교롭게도 필자의 이름이 명시되지 않았다.
아쉽다.
무슨 글이든 실명이어야 한다. 익명은 숨은 것이다.
자신의 글에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
받은 글을 그대로 옮긴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 나름의 판단이 있을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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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굶고라도 끝까지 읽어 보세요
<<역사를 비틀면 안 됩니다!>>
세상은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습니다.
승리한 쪽이 있으면 패배한 쪽이 있고.
빼앗는 자가 있으면 빼앗긴 자가 있으며.
이득을 본 자가 있으면 반드시 손해 본 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득도 손해도 보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왜곡도 거짓도 비틀어도 안 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역사입니다.
왜곡된 역사엔 이득을 본 자가 있는 반면 손해를 본 자가 있습니다.
거짓 역사엔 혜택을 누리는 자가 있는 반면 피해를 본 자가 있습니다.
흔히 역사는 승리한 자의 기록이라고 합니다.
승리한 자의 마음대로 역사를 기록할 수 있음을 지적한 것입니다.
역사의 편향과 편식은 너무도 위험한 것입니다.
역사의 왜곡과 비틀기는 더 위험합니다.
한강의 소설을 보고 소설이니 소설로 보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너무도 무책임한 사람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했습니다.
역사는 과거의 유물이 아닌,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는 살아있는 존재라고 합니다.
과거의 역사는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왜 이런 말들을 하겠습니까.
불운한 역사는 반복된다는 것 때문입니다.
즉 과거의 경험을 통해 현재와 미래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기 위해 진실의 역사가 필요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열쇠라는 겁니다.
어느 국가 어느 민족이건 역사를 통해 인류가 겪어온 다양한 시험과 도전, 성취와 실패에서 교훈을 얻고 있습니다.
역사란 우리 삶의 연대기이자, 인류가 걸어온 경로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행동, 생각, 감정, 사건들이 축적되어 현재를 형성하는 중요한 자료로 작용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볼 때 후대 세대는 앞선 역사를 통해 다양한 문화와 사상을 배우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점들이 각 시대 사람들의 가치관이나 관점을 느끼게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로 인해 사회구성원들은 서로 다른 관계와 사회적 맥락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실된 역사적 경험이 우리의 일상적인 삶과 함께 해야 하는 것입니다.
픽션이라는 가면에 가려 사실을 왜곡시키려는 의도를 가져서도 안 됩니다.
한강에 묻습니다.
5.18과 4.3의 역사를 제대로 알고 소설을 쓴 것입니까.
아니면 모르고 그저 소설의 소재로 이용한 것뿐입니까.
알고 썼다면 당신은 대한민국 근ㆍ현대 역사를 해친 사람이고.
모르고 썼다면 당신은 지금부터 당신의 책 내용이 대한민국 역사로 박제되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노벨상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당신이 태어나 오늘에 이르게 한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
대한민국 역사는 노벨상은 물론 그 어떤 것도 역사의 종지부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당신의 책을 근거로 이득을 보고자 하는 세력들이 나오고 있으니 그 책임정도는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노벨상과 당신을 앞세워 왜곡되고 비뚤어진 역사를 자기들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역사 소설은 비록 소설이라 해도 진실을 근거로 해야 하고.
더더욱 우리나라처럼 남북이 대치하고 있고, 남한 내 주사파와 종북세력들이 득세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심각한 문제를 낳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소설은 소설로만 보라며 당신의 소설이 남긴 부작용을 외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아직 역사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잘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누구는 비뚤어지고 뒤집어진 역사를 바로잡으려다 감옥에 가고.
누군가는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으려다 엄청난 벌금을 물고.
누군가는 진실을 밝히겠다며 사람을 해치고.
누군가는 역사를 뒤집었다가 목숨을 잃는 일도 벌어지는 게 역사논쟁입니다.
모두가 암울한 이 나라 역사이건만 지금도 역사왜곡이 판을 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노벨상의 기쁨은 혼자 다 차지하시고 또다시 시작되고 있는 역사논쟁의 책임을 회피하지 말라는 겁니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입니다.
6.25 전쟁이 그렇고 5.18과 4.3이 그렇습니다.
한국 사람만 죽은 것도 아니고, 전라도와 제주도 사람만 죽은 게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죽음은 천대 시 하면서 특정지역 사람들의 죽음만 억울하다 표현하면 바로 그것이 지식 편식이자 역사 편식인 것입니다.
지적하자니 너무 많아 한 가지만 따져 묻겠습니다.
당신의 소설 ‘소년이 온다’에는 “두부처럼 잘리어진 어여쁜 너의 젖가슴”이라는 문장이 등장합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광주에 투입된 공수 부대원들이 소녀의 젖가슴을 칼로 베었다는 것으로 인식됩니다.
제가 아는바 터무니없는 것이고요.
이 내용들은 당시 좌파들이 시민 선동을 위해 없는 사실을 만들어 뿌린 ‘전두환 광주살육작전’이라는 유인물에 들어 있는 내용 아닙니까.
‘전두환 광주살육작전’에는 끔찍한 내용들이 들어 있습니다.
첫째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 싹쓸이 하러 왔다’.
둘째 ‘공수부대원이 여자의 젖가슴을 대검으로 도려냈다’.
셋째 ‘공수부대원이 임신한 여자의 배를 대검으로 찔렀다’.
넷째 ‘죽은 시민을 불도저로 밀면서 처리하는 과정이 TV에 나왔다’.
다섯째 ‘공수부대원이 광주에 들어오면 광주시민을 무자비하게 죽일 것이다’.
여섯째 ‘공수부대원 곤봉 속에는 철심이 박혀 있다’.
일곱째 ‘공수부대원들이 독한 술과 환각제를 먹었고, 사거리 20미터의 화염방사기를 쏘았다’등이다.
이걸 믿습니까. 이거 누가 만든 겁니까. 이 유언비어 유인물을 작성한 사람은 광주운동권 김현장이라는 인물입니다.
김현장은 조선대학교 민주투쟁위원회 명의로 이문건을 작성하였습니다.
당시 김현장은 전남 구례의 천은사에 기거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김현장은 유인물 초안이 완성되자마자 전주의 정의구현사제단에게로 달려가 이를 전달합니다.
유인물을 전달받은 문정현 신부는 곧바로 전주성당의 고속복사기로 수 만 장 복사하여 천주교 조직을 통해 전국으로 보냅니다.
그런데 악성 유언비어 유인물을 작성한 김현장은 5.18 광주 현장을 직접 목격한 목격자가 아니었습니다.
이는 김현장이 김대중을 만나러 서울에 도착했지만 김대중이 연행되었다는 뉴스를 듣자마자 곧바로 구례 천은사로 피신했기 때문입니다.
김현장은 천은사에서 북한 방송이 퍼뜨리는 유언비어와 구례의 가톨릭농민회 회원들에게서 들은 유언비어를 토대로 80년 5월 21일 ‘전두환의 광주살육작전’이라는 유인물을 완성시켰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악성 유언비어 유인물 속의 내용을 소설 속에 묘사할 수 있는 겁니까.
바로 ‘전두환 광주살육작전’유인물 두 번째 내용이 그 내용이 아니냐고 묻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는 국민들이 그 문장을 읽으면 공수부대원들에 치를 떨지 않겠습니까.
아니 전체 군인을 증오하지 않겠냐고요.
이건 터무니없는 유언비어에 작가의 상상력을 덧칠해 또 다른 분노와 증오를 유발한 것입니다.
반드시 사실여부를 알아보시고 아니라면 국민과 공수부대원들에게 사과해야 할 것입니다.
제발 앞으로의 책은 한강 작가 개인의 상상력을 동원해 대한민국 역사를 난도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한강 개인의 문학성이 결코 대한민국의 역사가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한강 작가와 소설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전 총신대 총장을 지내신 정성구 박사의 우려에 공감을 하면서 그의 주장을 여기에 옮깁니다.
‘한마디로 그는 오늘의 자유대한민국을 저주하고, 국가를 범죄집단으로 몰아가는 좌파이론을 소설이라는 장르를 통해서 실현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6·25 김일성의 남침 전쟁을, 북조선의 주장대로 한국이 북침 했다고 쓰고 있고,
이승만 대통령이 자유대한민국을 세우는 중에 이를 반대하기 위한 건국 반대세력에 동조하고,
또한 공산당의 준동으로 이루어진 사태들을 희생자의 입장에서만 바라보았다’
제가 수많은 비판 중에 정성구 박사의 글을 일부 소개한 것은 이 분이 기독교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강산은 회개는 못할지라도 이 분의 지적을 꼭 곱씹어 보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5.18, 4.3 폭동을 군과 경찰이 진압하지 않았으면,
진압하더라도 성공하지 못했다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됐을까에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당시 진압을 못했다면 당신에겐 책 쓸 자유도 허락되지 않는 세상이 먼저 왔을 겁니다.
당신의 노벨상 수상을 함께 축하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울분을 모른 척하면 당신은 진짜 나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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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돌과 문학의 피 ― 한강 문학을 둘러싼 논쟁에 부쳐
역사는 돌에 새기는 문장이고, 문학은 그 돌 틈에서 흘러나오는 피의 목소리다.
돌만 바라보면 인간의 울음이 들리지 않고, 피만 바라보면 사건의 윤곽이 흐려진다. 역사와 문학이 서로를 필요로 하면서도 끝내 하나가 될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 를 둘러싼 논쟁도 이 두 언어가 만나는 위험한 경계에서 시작된다.
역사적 비극을 소설로 다룬 작가는 “소설은 허구일 뿐”이라는 말 뒤에 숨을 수 없다. 실제로 죽은 사람이 있고, 살아남은 이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으며, 사건을 둘러싼 기억이 오늘의 정치와 공동체를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를 소재로 삼는 순간 작가의 상상력은 자유인 동시에 책임이 된다.
상상력은 기록이 미처 닿지 못한 인간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등불이다. 그 등불이 사실을 태워버리는 불꽃으로 변해서는 안 된다. 작가가 역사적 사건 속에 가공의 인물과 장면을 세울 수는 있어도, 확인되지 않은 소문을 사실의 얼굴처럼 세워 증오를 증폭시킨다면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이 점에서 보수적 독자들이 제기하는 우려에는 경청할 대목이 있다.
국가폭력을 고발한다는 이유로 당시의 모든 군인과 경찰을 하나의 악으로 묶어서는 안 된다. 한 지역의 희생을 기억한다는 명분으로 다른 지역과 계층의 죽음을 지워서도 안 된다. 제주 4·3에는 무장대의 폭력과 토벌 과정의 민간인 희생이 함께 존재했고,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진상조사 역시 무력 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막대한 주민 희생이 발생했다고 기록한다.
5·18 역시 이념적 취향에 따라 마음대로 이름 붙일 수 있는 백지가 아니다. 대한민국의 법과 국가기록은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규정하고, 당시 헌정질서 파괴와 국가권력의 폭력을 공적 역사 안에서 다루고 있다.
이러한 공적 사실을 외면한 채 5·18을 단순한 폭동으로 부르거나 제주 4·3의 민간인 희생을 진압의 불가피한 부산물로만 축소하는 태도 또한 역사 왜곡이 될 수 있다. 역사를 바로 세우자고 외치면서 자신이 믿고 싶은 자료만 골라 읽는다면, 그 외침은 진실이 아니라 또 하나의 편식이 된다.
제시된 글에 “두부처럼 잘려진 어여쁜 너의 젖가슴”이라는 구절은 한강의 『소년이 온다』에 수록된 문장이
한강 글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이 표현은 1980년대부터 불린 「오월의 노래 2」의 가사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익명으로 이 글을 쓴 분도 한강이 인용했음을 간접적으로 언급한다. 물론 이런 구절이 있다고 해서 한강 작가가 ‘구태여 그 문장을 인용했어야 했는가?‘라고 반문할 수 있다.
한강의 문학을 향한 비판은 가능하다. 피해자의 고통에 지나치게 밀착하여 당시의 복잡한 정치적·군사적 맥락을 충분히 보여주지 못했다는 지적도 제기할 수 있다. 국가폭력의 참혹성을 형상화하는 과정에서 독자가 특정 집단 전체를 악으로 일반화할 가능성은 없는지 물을 수도 있다. 역사적 트라우마를 미학적 언어로 바꾸는 일이 타인의 죽음을 문학적 자산으로 소비하는 것은 아닌지도 따져야 한다.
노벨문학상은 작품에 대한 세계적 평가이지, 작품 속 모든 역사 인식에 내려진 무오류 판결문은 아니다. 한강은 2024년 역사적 트라우마와 인간 생명의 연약함을 다룬 문학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그 수상은 축하할 일이나, 수상이 비평의 문을 닫는 자물쇠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한강 작가 역시 자신에게 쏟아지는 모든 비판을 정치적 공격으로만 치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소설 속 상징과 장면이 실제 역사로 오인될 가능성, 작품이 한쪽의 상처만 확대하고 다른 쪽의 고통을 침묵시키지는 않았는지, 국제 독자가 한국 현대사의 복잡성을 지나치게 단순한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도로 받아들이지는 않는지 성찰할 필요가 있다.
위대한 작가는 박수만 듣는 사람이 아니다. 자신의 문장이 남긴 그림자까지 돌아보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문학을 역사 교과서의 하인으로 만들어서도 안 된다.
문학은 판결문이 아니다. 판결문이 확인된 사실을 배열한다면 문학은 그 사실 뒤에서 떨고 있던 한 사람의 체온을 복원한다. 역사책에는 사망자 수가 적히지만, 소설은 그 숫자 가운데 한 사람이 마지막으로 불렀을 어머니의 이름을 들려준다.
이것이 문학의 거짓이 아니라 문학만이 도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진실이다. 사실적 진실과 문학적 진실은 적이 아니다. 사실적 진실이 사건의 뼈라면 문학적 진실은 그 뼈에 다시 입혀지는 살이다. 뼈 없는 살은 형체를 잃고, 살 없는 뼈는 체온을 잃는다.
보수는 문학에 사실의 뼈를 요구해야 한다. 진보는 역사에 희생자의 체온을 요구해야 한다. 보수가 국가의 정통성만 말하며 국가가 저지른 잘못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진보도 국가폭력만 말하며 무장세력의 폭력이나 시대의 복합성을 삭제해서는 안 된다.
진실은 어느 진영의 사유재산도 아니다. 역사는 오른쪽 눈으로만 보아도 기울고, 왼쪽 눈으로만 보아도 깊이를 잃는다. 두 눈을 함께 뜰 때 비로소 사건의 거리와 인간의 얼굴이 보인다.
한강 문학을 무조건 성역화하는 태도도 위험하다. 한강 문학을 대한민국을 저주하는 선동으로만 규정하는 태도 역시 거칠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찬양과 저주의 양극단이 아니다. 사실은 차갑게 검증하고, 상처는 따뜻하게 바라보는 정신이다. 작가에게는 상상할 자유가 있다. 그 자유의 발밑에는 실제로 죽은 이들의 무덤이 놓여 있다. 비평가에게는 의심하고 비판할 자유가 있다. 그 자유의 손에는 확인된 자료와 절제된 언어가 들려 있어야 한다.
한강 작가는 작품 속에서 미처 품지 못한 역사적 복합성이 있었다면 더 깊이 돌아보아야 한다. 비판하는 이들도 출처가 불분명한 주장과 잘못된 인용으로 작가를 심판하려 했다면 먼저 자신의 문장을 성찰해야 한다. 반성은 어느 한쪽에만 요구되는 형벌이 아니다. 진실 앞으로 함께 걸어가기 위해 양쪽이 벗어야 할 낡은 신발이다.
이 글을 쓴 작가의 “역사는 함부로 비틀어서는 안 된다.”라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아울러 문학의 목도 졸라서는 안 된다.
역사가 사실의 땅을 단단히 지키고, 문학이 그 위에 쓰러진 인간의 숨을 일으켜 세울 때, 우리는 비로소 과거를 소유하는 민족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배우는 공동체가 될 수 있다.
역사는 승자의 깃발 아래만 기록되어서는 안 된다. 문학 역시 피해자의 눈물만으로 완성되어서는 안 된다. 국가를 지키다 목숨을 잃은 이의 이름과 국가에 의해 억울하게 죽은 이의 이름이 한 권의 역사 안에서 함께 불릴 때,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비로소 어느 진영의 무기가 아니라 모두의 거울이 된다.
거울은 편을 들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감추고 싶은 얼굴까지 보여줄 뿐이다. 그 거울 앞에서 한강도, 한강을 비판하는 이들도, 진보도 보수도 잠시 목소리를 낮추어야 한다.
역사의 마지막 문장은 아직 쓰이지 않았다. 그 문장을 완성하는 것은 승리한 진영의 붉은 도장이 아니라, 사실 앞에서 겸손하고 죽음 앞에서 공평하려는 우리의 양심이다.
문학은 역사를 대신할 수 없지만, 역사가 잊어버린 인간을 다시 불러올 수 있다. 역사는 문학을 재판해서는 안 되지만, 문학이 길을 잃지 않도록 진실의 북극성이 되어야 한다.
ㅡ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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