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 한쪽을 들고 골목을 나오다 ㅡ청람 김왕식
수박 한쪽을 들고 골목을 나오다 2026.08.04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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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 한쪽을 들고 골목을 나오다
서울의 오래된 골목들은 저마다 시간을 숨기는 방식이 달랐다. 어떤 골목은 낡은 기와 밑에 시간을 감추었고, 어떤 골목은 담벼락에 번진 빗물 자국 속에 묵혀 두었다. 우리가 찾아간 골목은 사람 한 명이 우산을 펴고 지나가면 맞은편 사람이 잠시 처마 밑으로 몸을 비켜 주어야 할 만큼 좁았다.
큰길에서 두어 번 방향을 꺾자 자동차 소리는 멀어졌다. 낮은 지붕들이 어깨를 맞대고 있었고, 에어컨 실외기에서는 뜨거운 숨이 골목으로 쏟아졌다. 창문 밖으로 내민 화분에서는 잎 끝이 말라 가는 고추가 자라고 있었다. 전봇대에는 오래전에 폐업한 철학관 광고와 수도관 수리 전단이 비에 불어 겹겹이 붙어 있었다.
골목 안쪽에 작은 음식점이 있었다. 우리가 대학 시절 가끔 찾던 김치찌개집이었다. 간판의 글씨는 예전과 달라져 있었다. 문짝도 알루미늄 새시로 바뀌었고, 문 옆에는 카드 결제가 된다는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가게 앞에 놓인 붉은 고무대야와 김치통만은 오래전부터 그 자리를 지켜 온 물건처럼 보였다.
누구도 먼저 확신하지 못했다. 수십 년 전의 기억은 장소를 정확히 보존하지 않는다. 실제보다 방을 넓게 만들기도 하고, 골목을 길게 늘이기도 한다. 젊은 날 자주 앉았던 자리는 언제나 실제보다 밝고 따뜻하게 남는다.
한 친구가 문 위의 처마를 올려다보았다. 다른 친구는 골목 건너편의 낮은 담장을 살폈다. 나는 출입문 아래 닳아 반들거리는 문턱을 바라보았다. 그 문턱을 보는 순간, 오래 접혀 있던 장면 하나가 안쪽에서 펴졌다.
우리는 그곳에 자주 왔다. 자주라 해도 형편이 될 때만이었다. 대학생에게 외식은 계획이 아니라 주머니 사정이 허락하는 우연에 가까웠다. 서너 명이 바지 주머니를 뒤져 동전과 구겨진 지폐를 한데 모으면 김치찌개 한 냄비와 탁주 몇 잔을 주문할 수 있었다.
그 집에서는 찌그러진 연녹색 냄비를 내왔다. 본래의 빛깔은 누런색이었으나 오랜 불길과 수세미에 닳아 누런 기운이 돌았다. 냄비 가장자리에는 작은 이가 빠진 듯 법랑이 벗겨진 곳이 있었고, 한쪽 손잡이는 조금 기울어 있었다. 그것은 가난한 학생들 앞에 놓이기에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냄비였다.
묵은지는 길게 찢어 넣었다. 배추 줄기는 국물을 머금어 투명해졌고, 잎은 젓가락을 대기 전부터 물러 있었다. 돼지고기는 살보다 비계가 넉넉했다. 검역 도장 검檢자가 흐릿하게 찍힌 껍질도 있었고, 더러는 털 몇 가닥이 고집스럽게 남아 있었다.
지금이라면 젓가락을 멈출 만한 일이었으나 그때 우리에게 그것은 위생의 문제가 아니었다. 고기 한 점이 더 들어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끓는 국물 속에서 털도 도장도 모두 한 시대의 풍경이 되었다.
대파를 두툼하게 썰어 얹으면 냄비는 곧 넘칠 듯 끓었다. 김치의 신 냄새와 돼지기름 냄새, 탁주의 누룩 냄새가 좁은 방 안에서 뒤섞였다. 벽에는 습기가 배어 있었고, 낮은 천장에서는 형광등이 희끄무레한 빛을 내렸다. 우리는 무릎을 접고 앉아 냄비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그때의 우리는 세상을 아는 것이 적었고, 세상에 대해 말하는 것은 많았다. 한 사람은 나라의 앞날을 걱정했고, 다른 사람은 문학의 죽음을 염려했다. 취직도 하지 않은 사람들이 경제를 논했고, 사랑 한 번 제대로 해 보지 못한 사람들이 인간의 고독을 오래 이야기했다.
막걸리 몇 잔이 돌고 나면 말은 더욱 커졌다. 세상은 금세 고쳐질 듯했고, 우리에게는 그것을 고칠 충분한 시간이 남아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밤은 길었으며, 젊음은 마르지 않는 통장 같았다.
그 집의 주인어른은 우리의 말을 듣는지 마는지 주방과 방 사이를 오갔다. 앞치마에는 붉은 국물이 말라붙어 있었고, 손등은 늘 물에 불어 있었다. 밥이 모자라면 말없이 반 공기를 더 내주기도 했다.
그 곁에는 젊은 딸이 있었다. 머리를 뒤로 단단히 묶고 어머니의 일을 돕던 사람이다. 그는 김치통을 옮기고, 빈 술병을 거두고, 젖은 행주로 상을 훔쳤다. 손님과 눈을 오래 맞추지 않았으며, 필요한 말만 낮게 했다. 웃는 얼굴보다 일하는 옆모습이 더 많이 기억되는 사람이었다.
그로부터 거의 반세기가 흘렀다. 가게 문을 열자 뜨거운 김치 냄새가 먼저 얼굴에 닿았다. 냄새는 기억보다 정확했다. 몸 안의 어느 오래된 서랍이 저절로 열리는 듯했다.
가게는 생각보다 작았다. 벽지는 새것으로 바뀌었으나 아래쪽에는 습기가 만든 검은 얼룩이 번져 있었다. 천장 모서리에는 오래된 환풍기가 느린 소리를 내며 돌고 있었다. 메뉴판의 가격은 몇 번이나 덧붙여 고친 흔적이 있었다. 가장 안쪽에는 텔레비전이 켜져 있었으나 누구도 화면을 보지 않았다.
구석자리에는 늙은 여인이 앉아 있었다. 그가 오래전 주방에서 어머니를 돕던 딸이라는 사실을 알아보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의 몸은 작아져 있었다. 어깨는 안쪽으로 조금 접혔고, 무릎 위에는 얇은 담요가 덮여 있었다. 한 손은 의자 팔걸이를 쥐고 있었으며, 다른 손은 무릎 위에서 가만히 포개져 있었다. 머리카락은 대부분 희었고, 이마와 눈가에는 오래 일한 사람에게만 생기는 잔주름이 촘촘했다.
그가 우리를 바라보았다. 금세 알아본 것은 아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한 사람씩 천천히 살폈다. 얼굴 위에 남아 있는 옛날의 흔적을 찾는 듯했다. 우리도 그를 바라보았다. 서로가 서로의 젊음을 찾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한 친구의 눈썹에서 오래 머물렀다. 입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정확한 이름은 떠오르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역시 그 젊은 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이름보다 먼저 남는 것이 있었다. 어느 자리에 앉았던 사람들, 국물을 여러 번 더 달라던 학생들, 냄비 바닥의 김치까지 젓가락으로 긁어먹던 얼굴들. 그는 우리를 어렴풋이 기억했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사람이 반세기 전의 손님을 완전히 기억한다는 것은 사실에 가깝지 않다. 기억은 얼굴 전체를 보존하지 않는다. 웃을 때 올라가던 한쪽 입꼬리, 술잔을 쥐던 손, 자주 앉던 자리처럼 쓸모없어 보이는 조각을 오래 품는다. 그 조각들이 우리 사이에서 잠시 서로를 알아보았다.
지금 주방을 맡은 이는 그의 며느리였다. 중년을 훌쩍 넘긴 며느리는 빠른 손을 지녔다. 주문을 받으며 냄비를 올리고, 반찬 그릇을 채우면서 계산대의 전화까지 받았다. 몸은 분주했으나 얼굴에는 조급함이 없었다. 손님이 숟가락을 떨어뜨리면 말보다 먼저 새 숟가락을 가져다 놓았고, 물병이 비어 가는 상을 눈여겨보았다.
상냥하다는 말은 때로 막연하다. 그의 상냥함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 데 있었고, 사람을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는 데 있었다. 늙은 시어머니가 몸을 조금 움직이면 주방에서 곧바로 고개를 내밀어 살폈다. 무릎 위의 담요가 흘러내리면 다가가 말없이 바로잡아 주었다.
시어머니는 가게 구석에 앉아 있었으나 쫓겨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 자리는 가게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자리였다. 며느리는 주방을 지키고, 시어머니는 오래된 시간의 증인처럼 가게 한쪽을 지키고 있었다.
세대는 그렇게 자리를 바꾸었다. 첫 주인은 이미 세상에 없었다. 그의 딸은 불 앞에서 물러나 구석에 앉았고, 이제 며느리가 국자를 들고 있었다. 사람은 늙고 손은 바뀌었으나 찌개는 같은 자리에서 끓고 있었다.
김치찌개가 나왔다. 냄비는 예전의 연녹색 법랑 냄비가 아니었다. 검고 단단한 양은 냄비였다. 모양은 반듯했고 손잡이도 흔들리지 않았다. 돼지고기는 깔끔하게 손질되어 있었고, 대파는 일정한 두께로 썰려 있었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끓는 냄비를 바라보았다. 지글거리는 소리가 먼저 과거를 불러왔다. 묵은지가 국물 속에서 뒤집힐 때마다 붉은 기름이 가장자리로 번졌다. 김이 올라와 안경알을 흐리게 했다. 한 친구는 안경을 벗어 옷자락으로 닦았다. 다른 친구는 뜨거운 국물을 서둘러 삼키다 잠시 기침을 했다.
모두 늙어 있었다. 한 사람은 숟가락을 쥔 손등에 검버섯이 번져 있었고, 한 사람은 무릎이 불편한지 자주 자세를 바꾸었다. 예전에는 냄비 앞에서 서로 좋은 고기를 먼저 집어 가려했는데, 이제는 상대의 그릇에 부드러운 김치를 밀어주었다.
탁주는 조금만 시켰다. 술병은 냄비 곁에 오래 남아 있었다. 젊은 날에는 비워 내는 일이 중요했으나 이제는 남겨 두는 일도 자연스러웠다.
말도 많지 않았다. 누구의 자녀가 어디에서 사는지, 누구의 허리가 좋지 않은지,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동창이 누구인지 짧게 나누었다. 오래전에 품었던 꿈들은 화제에 오르지 않았다. 꿈이 이루어졌는지 실패했는지를 따지는 나이도 지나 있었다.
친구 하나가 국물 속에 잠긴 김치 줄기를 오래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젊은 날의 어떤 저녁이 겹쳐 있는 듯했다. 우리 가운데 이미 없는 사람도 그 냄비 둘레에 함께 앉아 있었을 것이다. 이름을 입 밖에 내지 않아도 빈자리는 저마다의 마음속에 마련되어 있었다.
식사는 천천히 끝났다. 우리는 그릇을 비웠고, 며느리는 빈 반찬 접시를 차례로 거두었다. 구석에 앉은 시어머니는 가끔 우리 쪽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반가움과 피로, 오래된 가게를 다시 찾아온 손님을 향한 희미한 자부심이 함께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날 때에는 모두가 한 번씩 탁자를 짚었다. 젊은 날에는 몸이 먼저 일어났고 마음이 뒤따랐다. 이제는 마음은 일어나려 하는데 무릎이 잠시 시간을 요구했다.
계산을 마치고 문 쪽으로 향했을 때 며느리가 우리를 불러 세웠다. 그 목소리에는 특별한 의미가 실려 있지 않았다. 잠시만 기다려 달라는 평범한 말이었다.
그는 주방 안쪽으로 들어갔다. 냉장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고, 칼이 도마에 닿는 둔한 소리가 몇 번 이어졌다. 우리는 출입문 근처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한 친구는 신발을 이미 신었고, 다른 친구는 허리를 굽혀 구두 뒤축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며느리가 작은 접시들을 들고 나왔다. 접시마다 수박 한쪽이 놓여 있었다. 수박은 크지 않았다. 붉은 살 가운데 검은 씨가 촘촘히 박혀 있었고, 껍질 가까운 부분은 연한 분홍빛이었다. 냉장고에서 막 꺼낸 듯 표면에 투명한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며느리는 친정어머니가 시골집 텃밭에서 농사지어 보내 준 수박이라고 했다. 두어 통 얻어먹어 보니 제법 달기에, 오래된 단골들에게 한쪽씩 드리고 싶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말은 짧았다.
그는 자신이 특별히 좋은 일을 한다는 표정을 짓지 않았다. 밥상에 빠진 반찬 하나를 뒤늦게 내놓는 사람처럼 자연스러웠다. 그 자연스러움이 우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시골의 늙은 어머니가 텃밭에 수박 모종을 심었을 것이다. 흙을 고르고, 줄기가 쓰러지지 않게 북을 돋우고, 가뭄이 든 날에는 물을 날랐을 것이다. 몇 개 되지 않는 수박을 익을 때까지 살피다가 딸에게 보냈을 것이다.
좋은 것은 자식에게 보내고 싶은 마음. 딸은 그 수박을 먹다가 자신의 친정어머니를 생각했을 것이다. 맛이 있으니 가게에 온 손님들에게도 조금 나누고 싶었을 것이다.
수박 한쪽에는 세 여자의 시간이 포개져 있었다.
가게를 처음 열어 배고픈 학생들에게 찌개를 끓여 주던 시할머니. 젊은 날 주방에서 어머니를 돕다가 이제는 거동이 불편해 구석자리에 앉은 시어머니. 한 번도 만나지 못했을지 모르는 시할머니의 가게를 이어받아, 친정어머니가 키운 수박을 손님에게 나누는 며느리.
그들이 서로 같은 말을 배운 적은 없었을 것이다. 마음은 말을 통하지 않고도 대를 이었다.
음식점의 비법은 묵은지의 숙성 기간이나 돼지고기의 부위에만 있지 않았다. 배고파 보이는 사람에게 밥을 조금 더 내주는 마음, 좋은 것이 생기면 한쪽 떼어 건네는 손이 이 집의 가장 오래된 양념이었다.
우리는 수박을 하나씩 받아 들었다. 아무도 곧바로 먹지 않았다. 일흔을 바라보는 남자 서너 명이 출입문 곁에 서서 붉은 수박 한쪽씩을 들고 있었다. 손등에는 핏줄이 도드라져 있었고, 손톱 가장자리에는 나이 든 사람 특유의 흰 빛이 돌았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누구도 감동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고맙다는 말도 처음 한 번 뒤에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 그런 말은 이미 수박의 붉은 속살 앞에서 조금 가벼워져 있었다.
한 사람이 수박 끝을 천천히 베어 물었다. 씹는 동안 그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달다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우리도 뒤따라 한입씩 먹었다. 차가운 과즙이 혀끝에서 터졌다. 수박은 잘 익어 있었다. 단맛은 과하지 않았고, 시골 텃밭에서 햇볕을 오래 받은 과일 특유의 향이 났다. 그 맛 속에는 이상하게도 김치찌개의 신맛이 함께 있었다.
가난했던 대학 시절의 허기, 돌아가신 첫 주인의 젖은 앞치마, 주방을 오가던 젊은 딸의 옆모습, 지금은 구석에 앉아 있는 늙은 시어머니, 불 앞에서 세 번째 생을 이어 가는 며느리가 한꺼번에 떠올랐다.
우리는 수박을 먹으며 늙은 자신의 얼굴도 보았다. 예전의 우리는 남이 내어 주는 것을 당연하게 받았다. 밥을 더 주면 먹었고, 국물을 더 부어 주면 잔을 채웠다. 누군가의 손이 얼마나 오래 물에 젖어 있었는지, 한 냄비의 찌개가 어떤 노동을 거쳐 상에 오르는지 생각하지 못했다.
나이가 들고 나서야 한쪽을 내어 주는 일이 얼마나 귀한지 알게 되었다. 사람은 큰 것을 받아서 감동하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을 위해 따로 떼어 둔 작은 몫이 있다는 사실 앞에서 마음이 무너졌다.
시어머니는 구석자리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며느리는 다시 주방으로 돌아가 냄비를 씻고 있었다. 수도꼭지에서 쏟아지는 물소리와 철제 그릇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우리에게 감동을 주려 하지 않았다. 그저 수박을 나누었을 뿐이었다. 우리는 그 수박 앞에서 각자의 어머니를 떠올렸을 것이다. 이미 세상에 없는 어머니도 있었고, 병든 몸으로 누워 계신 어머니도 있었으며, 오래전 자식에게 좋은 것을 골라 주던 손만 남은 어머니도 있었다. 친구들 가운데 한 사람이 고개를 조금 숙였다. 수박씨를 뱉기 위한 것인지 눈가를 감추기 위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우리는 수박 껍질을 빈 접시에 가지런히 놓았다. 붉은 살은 거의 남지 않았다. 희고 연한 속껍질이 이빨 자국을 따라 고르지 않게 패여 있었다. 가게 밖으로 나오자 골목은 여전히 더웠다. 에어컨 실외기에서 뜨거운 바람이 불었고, 멀리 큰길 쪽에서 버스가 정차하는 소리가 들렸다. 음식점 환풍구에서는 김치와 돼지고기가 끓는 냄새가 계속 흘러나왔다.
우리는 잠시 골목에 서 있었다. 누구도 서둘러 앞장서지 않았다. 예전에는 이 집을 나오면 다음 술집을 정했을 것이다. 지금은 각자 돌아갈 집과 약 먹을 시간이 있었다. 한 친구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입가를 닦았고, 다른 친구는 골목 끝을 오래 바라보았다.
뒤돌아보니 출입문 안쪽으로 늙은 시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그 옆을 며느리가 지나갔다. 잠시 두 사람의 몸이 겹쳐 보였다. 한 사람은 앉아 있고 한 사람은 걸었으나, 둘의 손에는 같은 시간이 흐르는 듯했다. 그 집의 첫 주인은 이미 없었다. 그가 쓰던 연녹색 냄비도 사라졌다. 냄비에 붙어 있던 돼지털 몇 가닥과 검은 도장 자국도 이제는 웃으며 떠올리는 먼 풍경이 되었다. 가게의 벽과 그릇, 주방을 지키는 사람까지 모두 바뀌었다.
사라지지 않은 것이 있었다. 맛있는 것을 남에게 한쪽 건네는 마음. 그것은 첫 주인의 손에서 딸에게로, 딸에게서 며느리에게로 이름 없이 건너왔다. 핏줄만으로 이어지는 유산은 아니었다. 오랜 세월 한 공간에서 사람을 먹이고 바라본 이들이 몸으로 익힌 마음의 습관이었다.
우리는 골목을 천천히 걸었다. 등 뒤에서 음식점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 다시 오자는 말을 했을 법도 했다. 아무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우리 나이의 ‘다시’에는 언제나 작은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가게가 그대로 있어도 우리가 다시 모일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기에 우리는 말없이 걸었다. 한동안 수박의 찬 기운이 손바닥에 남아 있는 듯했다.
나는 걸으며 생각했다. 세월은 사람에게서 많은 것을 가져간다. 검은 머리와 단단한 무릎을 가져가고, 밤새 술을 마셔도 끄떡없던 몸을 가져간다. 함께 웃던 사람을 데려가며, 오래된 냄비와 주인의 목소리까지 하나씩 치워 간다.
세월도 끝내 가져가지 못하는 것이 있다. 사람이 사람에게 한쪽을 떼어 주는 마음. 그 마음은 낡지 않는다.
그날 우리는 김치찌개를 먹으러 갔다가 수박 한쪽씩을 받아 들고 나왔다. 수박은 골목을 벗어나기 전에 모두 먹어 없어졌다. 붉은 것은 입안에서 사라졌으나, 내어 준 사람의 마음은 오래 남았다.
그것은 한여름 수박의 단맛이라기보다, 삼대에 걸쳐 한 가게를 지켜 온 사람들의 체온이었다. 우리는 그 체온을 손에 들고 한동안 서로의 늙은 얼굴을 바라보았다.
말은 없었다. 말보다 오래 남는 것이 우리 사이를 지나고 있었다.
ㅡ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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